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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May 23. 2024

유럽의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  

이기적 태도를 위한 포장지

'개인주의'라는 말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 것은 용어에 정확한 개념 없이 대충 사용하게 된 것이 일차적 이유고, 시대가 많이도 변한 것이 이차적 이유다.


'개인주의'와 관련해서 언젠가부터 '외국에는 안 그래'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대한민국의 강력한 '집단주의'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직장을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선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고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개인의 취미나 취향 따위를 찾는 것은 좋은 부모의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1940-50년대에 태어난 그들에게는 애초에 그럴 여유조차 허락된 환경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에는 그야말로 개처럼 일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억눌린 '나'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서양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을 빌려오기로 한다.


서양의 오랜 개인주의의 원천을 논할 때 많이 쓰던 예가 있다.  


영어는 항상 세계의 중심인 나 즉, 'I'로 문장을 시작하고, 문장을 만들 때도 주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위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개인'을 가장 존중하는 서양의 '개인주의'때문이라고...(영어와 같은 뿌리 West Germanic languages를 두고 있는 독일어 역시 비슷하다)


실제 개인주의와 언어가 얼마나 밀접한 인과관계를 만들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서구가 과거 한국에 비해 개인의 취향과 선택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였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문화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집단 보다 개인이 더 중요할 수 없는 대표적 상황은 전쟁이다. 전시에 누가 개인의 자유와 취향 따위를 존중해 줄 수 있겠는가. 개인의 자유 따위를 디밀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쏴 죽이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5월 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종전 이후에도 미국과 유럽은 마샬 플랜(Marshall Plan)이라는 유럽 부흥 계획을 갖고 재건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공산주의와 대립 아니겠는가. 그렇게 '핵'이라는 강력한 무기들을 보유하면서 강대국들의 군사 전쟁은 조용해졌다.


Trümmerfrauen(잡석여성들) 여성들 / 출처 : https://blog.naver.com/dohwasun/80113744302


전쟁과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독일의 상황을 잠시 보자.


전쟁 이후 독일 초기 재건 사업에 있어 15 - 50세 사이의 여성들까지 노역에 동원되었다. 남자들이 전쟁에서 많이 죽은 탓도 있지만, 국가를 위해 여자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여전히 개인보다는 집단과 국가가 더 중요한 사회였다는 뜻이다.


냉전의 종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1989년 11월 09일이라고 보면 서구 사회의 평화가 온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불과 30년도 안된 얘기다.

  




유럽에서 지난 30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싸워왔던 이슈는 아마 '자유'가 아닐까 한다.


여성으로서의 자유, 아동으로서, 노동자로서, 외국인으로서, 인종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살고 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얻어낸 '나의 자유'는 분명히 값지다.


그러나 모든 개인주의가 투쟁으로만 쟁취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전쟁 이후 자연 발생된 문화로도 볼 수 있다.


전쟁 후 패허가 된 국가는 모든 국민을 일일이 보호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은 국가의 규모가 클수록 더 심했다. 국민들은 나름대로 자기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 방식은 지역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럽의 큰 국가들이 최소한의 분쟁으로 국가의 운영하는 방식은 어느 선까지의 '방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최소한의 보호를 보장해 주는 것 역시 분쟁을 줄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복지'와 '자유'라는 두 가지의 큰 기둥은 유럽을 굴러가게 하는 큰 틀이 되었다. 물론 유럽도 국가별로 차이가 있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큰 나라들은 더 많은 '자유'또는 '방임'으로 소수가 이끄는 사회로 운영되고, 북유럽 같은 작은 국가들의 더 많은 통제를 통해 더 많이 국민이 함께 가는 방식을 추구하기도 한다.




긍정적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라는 말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다.


많은 경우 굳이 '주의(主義)'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현대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합의된 '자유'의 영역에 해당되는 경우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모두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되어야 할 것,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는 결국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마음 대로 해도 돼'라는 말처럼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복잡한 사회망에서 내 자리는 어디까지 인가...



부정적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의 그럴듯한 포장지일 뿐이다.

 

아직도 '개인주의'라는 말로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보호하려는 모습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위에 언급한 긍정적 의미의, 그러니까 자유로써의 '개인주의'에 항상 따라붙는 말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의 영역과 이익이라는 것은 긴밀하고 복잡하게 연결되어있다. 그 말은 내가 내 마음대로 했을 때,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 그 행동은 남의 마음과 부딪치고, 남의 이익과 상충될 확률이 아주 높다는 뜻이다.  


오래된 예로 한국에서 단체로 밥을 먹을 때 빨리 먹기 위해 메뉴를 통일시키던 시절이 있었다. 쉽게 말해 나는 짬뽕을 먹고 싶은데 짜장면을 먹어야 되는 상황인 것이다. 엄연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다.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걸 마음대로 못 먹는다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 단체가 점심시간 이후에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면 어떤가. 다들 빨리 먹고 함께 이동해서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이벤트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한 직원이 '모든 사람이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다면 말이다. 이것은 회사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기주의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로의 이익이 부딪치는 상황은 사실 더 복잡하다. 예를 들면 점심시간 이후의 일이 회사 입장에서만 중요하고, 직원의 입장에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상황이 아닐 때다. 직원은 '회사의 상황'보다 '식사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그 '회사의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의 영역이 누군가에는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끔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독일 내에서도 베를린은 유독 '이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다른 도시에 비해 단위 면적당 사람이 많고 템포가 빠르고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이익'이 끊임없이 부딪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길에서 서로 말다툼을 하는 것은 흔히 보는 일상이다. 보행자와 자전거가 싸우고, 자전거랑 자동차가 싸우고, 자동차와 자동차도 싸운다. 이웃집과 싸우고, 회사와 싸우고... 크고 작은 분쟁들이 아주 많이 일어나는 도시다.


교통체증과 주차문제로 앓고 있는 베를린 / https://www.inforadio.de/


문제는 이거다.


과거에는 '개인의 자유'였던 행동이 더 이상 자유가 아니게 된 것이다.


개인의 평균적인 지식과 생활 수준은 점점 좋아지고,


사람과 차가 많아졌다.


더 크게는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개인 간의 연결은 너무나 긴밀해져 버렸다.


같은 행동이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아닌 '타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 살면서 늘 사람에 치이고, 차에 치이며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 - 국토 역시 인구에 비해 매우 작고, 그에 반해 미디어의 힘은 매우 크기 때문에 서로의 이익이 상충할 수밖에 없는 사회다.


그러나 유럽은 한국에 비해 훨씬 여유로운 사회였다. 땅은 넓고 사람은 많고, 미디어의 힘은 미약했다. 그러나 에제는 점점 더 많은 이익들이 충돌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베를린의 도로 문화를 예로 들면,


독일 사람들은 좌회전이나 우회전할 때 각을 크게 돌기 위해 옆 차선은 미리 먹어 놓고 운전하는 경우가 많다. 회전 각이 아무 충분한대도 그런 습관을 가지 사람들이 많다. 신호등이 저 멀리 빨간 불이면 몇 백 미터 전에 벌써 정차를 경우, 잘 세우면 차가 3대 들어갈 공간에 떡하니 혼자 주차를 하는 경우. 그리고 도로 양쪽으로는 한 차선 혹은 가끔 두 차선까지 먹고 정차한 차들도 많다.


위에 예로 든 모든 경우는 공간에 비해 사람이 적고 차가 적으면 다 '자유'의 영역으로 두어도 된다. 차가 밀려 앞뒤에 딱 붙어있는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앞에 차가 길을 막고 있으면 살짝 돌아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베를린에서 충분히 '이기주의'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 비해 서로의 공간이 좁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서는 '자유'였던 일이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돼버리는 것이다.




미디어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개념을 바꾸는데 큰 몫을 한다.


과거 '개인주의'의 개념으로 보면 내가 내 인스타에 무엇을 업로드하던 유튜브 채널에 무엇을 업로드하던 그것은 하던 내 자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것이 꼭 혐오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타인 또는 사회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가 되기에 충분하다.




'집단주의'에 반하는 개념 혹은 '개인의 자유'로서의 '건강한 개인주의'는 지켜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특히 현대사회에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는 '개인주의'는


사실 '이기주의'의 허울 좋은 포장지일 뿐이다.  


유럽을 포함한 서구는 한 때 '개인주의'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선진성을 자랑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다르다. 앞으로는 그 '개인주의'의 충돌이 점점 더 많은 사회적 분쟁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아니 이미 만들어 내고 있다.


'집단주의', '전체주의'로 피를 본 서구가 감히 '개인주의'를 건드릴 수 없기에, 미디어가 사회 현상을 다룰 때 자신들의 '이기적 문화' 비판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서구의 많은 문제들은 '개인주의'를 가장한 '이기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성장해 온 방식이 오로지 '미국 지향적'이었다면 지금은 '유럽 지향적'인 부분도 많아진 것 같다. 그 이유는 이제는 경제를 넘어서 '자유', '평등', '인권'등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럽의 '개인주의'는 답이 아니다.


우리가 '개인의 자유'와 함께 끄집어내어야 할 것은, '이타주의'다.


이제는 고리타분해져 도덕책에나 나올법한 그것을 끄집어내어 우리 사회를 이루는 정신으로 가져가야 한다.    



image : https://mindhub.kr/blog/33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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