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까지 속은 줄도 몰랐을 뻔했네요.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평균 이하로 못하는 운동 중 하나가 오래 달리기였다. 사실 엄청 긴 거리도 아니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도는 1km 달리기로 기억한다. 오래 달리기라는 게 참 신기했다. 다른 운동은 영 못하는 친구들이 매우 좋은 기록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운동 좀 한다 하는 애들이 완주를 힘들어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기가 운동 좀 한다고 하는 놈들은 시작부터 내달리다 지친 것 같다.) 어렴풋이 나도 언젠가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도착점에 들어온 기억이 난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때부터 나는 나에게 오래 달리기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 심폐지구력이 부족한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 근지구력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근력과 순발력은 나름 자부심이 있었으니까 이런 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이다. 대충 30년 동안 믿고 살아온 사실이다.
몇 주전에 일요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리나가 스프라이트가 마시고 싶다고 했다. 독일은 일요일에 슈퍼마켓도 죄다 문을 닫으니 탕크슈텔레(Tankstelle)-주유소로 사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주유소에서 한국의 편의점 역할을 한다. 가격은 일반 슈퍼에 비해 사기 수준으로 비싸다.
집에서 1.5 km 정도 떨어진 주유소를 '천천히 뛰어서 가볼까...' 하는 생각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운동을 이렇게 안 하고 살다 간 금방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 몇 년간 쭉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주유소까지 아주 천천히 뛰었다기보다 좀 빨리 걸었다. 그럼에도 왜 이리 숨이 차던지, 중간에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천천히 걸어갈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간판이 보이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없던 승부욕이 좀 올라왔는지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정강이 근육이 찢어지는 듯하여 발목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호흡이 가빠지니 산소부족이나 심장마비가 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좀 됐지만 이겨낸 건지 아니면 멈춰 설 타이밍을 놓친 건지 어쨌든 주유소에 도착했다! 사실은 주유소보다 3m 앞에 있는 간판 앞에서 '여기부터가 주유소 시작이야!!'라며 곧장 주저앉아 정신승리를 했다. 숨을 헐떡이면서 정신승리를 10분 정도 한 뒤에야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리나의 스프라이트와 나의 파워에이드를 사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파워에이드 참 달다. 기분도 좋고. 생각해보니 속도야 어쨌건 이 거리를 안 쉬고 뛰어본 적이 없다. 40년 동안 없었다. '오~ 내가 오늘 인생의 첫 경험을 했네. ㅋㅋ' 그래서 기분이 꽤 좋은가보다 하다가. '아닌가.. 달리면 좋은 호르몬이 나온다더니 그래서 그런가...'하기도 하고. 작은 성취감 때문인지 달리기의 효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상쾌하다.
그다음 날 저녁에 목이 간질간질하더니 몸살이 왔다. 1주일 동안 기침하고 오돌오돌 빌빌거렸다. 역시나 그거 뛰고 오버한다고 아내에게 혼났다.
근데 아픈 1 주일 내내 빨리 나아서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다시 1.5킬로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그 날 운이 좋았었나? 나는 다시 뛸 수 있는 컨디션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1 주일하고 3일이 지나 몸은 완벽하게 낫지 않았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달리러 나갈 계획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겠다. 기상과 운동은 생각하면 진다는, 그냥 뛰쳐나가라는 유튜브를 어디서 봤던 것이 주효했던 것도 같고...
저녁 먹고 아내와 딸은 공부하고 있었고 내가 필요한 시간은 딱 10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미친놈 마냥 뛰쳐나갔다. "나 좀 뛰고 올게!!" 그 길로 어디로 달릴지 계획도 없이 그냥 대충 동네 어딘가를 돌았다.
나는 12분 만에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둘은 그대로 공부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주 많이 변했다. 땀에 흠뻑 젖었으며 다리 이곳저곳의 근육이 땡겼고 머리가 맑았다. 12분 동안 숨 쉬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그만 달릴까.'를 10초에 한 번씩 고민했지만 결국 해냈다. 1.76km를 저 속도로 뛰고 이런 글 쓰는 게 누가 보면 웃길지도 모르지만 그때 느낌은 충격적이었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디서 들은 얘기가 있다.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사자를 그렸는데 좀 많이 다르게 그렸었나 보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림 못 그린다고 놀렸단다. 선생님은 사자의 모습을 친절히 가르쳐줬고. 그때부터 그 아이는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단다. 평생 동안. 그 아이는 진짜 그림을 못 그리는 아이였을까 아니면 그림을 못 그리게 된 아이였을까.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정의하며 산다. 성격은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그리고 싫어하는 것은 다시 한번의 여지도 없이 밀어냈을 것이고 못하는 것은 적당히 시도했을지언정 끝까지 가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원래 이건 못하는 사람'이라는 좋은 명분이 있으니까.
알량한 경험들을 통해 나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빼앗아버렸을까. 내가 빼앗긴 것들은 무엇 무엇일까.
나는 그 날부터 13일째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있다. 가능한 계속 매일 달려볼 계획이다. 왠지 매일 달리다 보면 내가 나에게 빼앗아버린 것들을 하나씩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