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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Oct 03. 2020

나의 미천한 달리기

매일 달리기 30일 성공기

도전은 용기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단지 막연한 동경의 마음이 도화선이 되고 좋은 타이밍에 실수라는 작은 불꽃이 만나면 도전은 시작된다. 적어도 내가 저지른 도전이라 할만한 것들은 그랬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 독일에 오게 된 것, 달리기를 하게 된 것. 이런 내 인생의 굵직한 변화는 모두 생각지도 않은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을 뿐 시작부터 어마 무지하게 거창한 마스터플랜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경우는 완벽한 계획만 짜다 지치거나 무거운 마음으로 몇 번을 시도하다 나가떨어지곤 했다. 다른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나의 달리기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어느 날 저녁 편의점으로 뛰어갔던 것이 발단이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뛰쳐나가 10분 동안  동네를 돌고 온 것이 시작이었다. 오래 달리기는 여전히 나에게 딱히 매력적이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달리기에 대한 어떤 용품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매일 달리기 따위를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새벽에 시작하는 일상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내 아름답고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달리기를 며칠 가벼운 마음으로 뛰다 보니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서 내 코스나 기록들을 모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물론 나를 아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나를 위한 나만의 기록 저장소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게 이틀째인가 내 달리기 정보를 올렸는데 잠시 후 지인 한 두 명이 'like'를 눌렀다고 알람이 떴다. '와... 알고리듬이 이렇게 무섭구나...''알고리듬은 내 인스타를 내 지인들에게 노출시키고 그들은 그게 난 줄도 모르고 '좋아요'를 누르다니...' 신기했다. 그런데 점점 낌새가 이상한 게, 이게 한 두 명이 아니라 점점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는 것 아닌가. 설마.. 설마... 했지만... '망했다. 내 개인 비밀 계정이 아닌 운영하는 사업체의 인스타에 업로드하다니!' 지울까...? 말까...? 를 좀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뿐 아니라 더 많은 곳에 더 자주 올리기로 했다. 그 이후 나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브런치에 나의 달리기에 관한 글을 올리고, 친구들과 함께 오픈 채팅방도 만들어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나는 나의 작은 성취들을 공공연하게 나눈 적이 있던가? 


나는 스스로 해내는 많은 것들에 대해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늘 '그게 뭐 밖으로 드러낼 만한 일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것이 사실에 가깝다. 나는 누가 봐도 대단한 능력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대단한 결과물만 드러내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어!     


그래서 나는 나의 삶과 그 과정에 대해 더 사랑하기로 했다. 더 많이 자랑스러워하기로 했다. 대단한 사람들이 대단한 성취를 이루는 것과 별개로 나는 내 것을 더 사랑할 것이다. 

 

<앱 없이 달린 날, 다른 앱을 사용한 날의 기록은 과감히 날린다>
매일 달리기 30일, 새벽 달리기 16일, 총 127,4km 


이 기록은 미천하기 짝이 없다. 몇 년씩이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 10km 이상을 달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고 그 보다 더 어마어마한 도전을 수도 없이 성취해낸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예를 찾기 위해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달리는 새벽, 공원에서 자주 마주치는 할아버지는 80세는 족히 넘어 보이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천히 달리시지만 연륜이 보인다고나 할까. 젊어서부터 달리기를 하셨을 거다.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할 거리를 달리셨을지 모를 일이고, 몇십 년을 매일 달리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다. 그런 숫자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저 연세에 형광색이 잔뜩 들어간 아식스 러닝화를 신고 멋진 러닝 모자를 쓰고 새벽 달리기를 하시는 것만으로 그는 그냥 멋지다. 세상은 이렇게 멋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이룬 것들을 나도 이루기 위해 뛰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달리기가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에 뛰고 싶을 뿐이다. 




달리기를 하면서 가장 먼저 얻은 것은 외모의 변화다. 


내 몸무게는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84kg이었고, 얼굴은 피곤하게 부은 전형적인 아저씨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무런 식단 조절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무게는 78kg대로 약 6kg 정도 감량됐다. 그리고 여전히 아저씨 얼굴이지만 생기가 좀 도는 아저씨 얼굴이 됐다. 인생에 쩔은 느낌이 조금 사라졌달까? 아침에 거울을 볼 때 삶의 활력이 내 낯빛에서 느껴지면 기부니가 아주 좋다.   



새벽 달리기를 시작하기 까지.


처음에는 저녁에 달리다 보니 가족들 눈치도 좀 보였다. 10분이던 달리기가 30분이 되고 하면서 나 혼자 자유시간을 만끽하는 것 같은 작은 죄책감도 없지 않아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기를 하고 돌아와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이미 퇴근을 한 시간이니 집안일과 육아 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아내와 아이가 함께 공부를 하고 있다거나 하면 나는 하염없이 스트레칭을 하고 아이스팩 마사지를 했다. 첫 며칠에는 잠깐만 달려도 안 쓰던 근육들이 살려달라고 난리를 치니 그럴 만도 하지만 계속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 차라리 아침에 좀 더 일찍 일어나자!'

'아이 등교도 시켜야 하고 잡힌 약속들도 있다. 이제 하루가 막 시작했는데 언제까지 폼롤러에 아픈 종아리만 굴려대고 있지는 않겠지.' 


아침에는 바쁜 일들이 있으니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내 기상시간은 점점 빨라져 한때 4시 30분까지 갔다가 지금은 5시 30분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 찾다.


내 기상 시간이 4시 30분까지 빨라졌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요즘 글쓰기가 너무 재미있어졌기 때문이다. 꾸준한 글쓰기는 올해 나의 목표였다. 다행히 끈을 아예 놓지는 않았지만 꾸준함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글을 쓸 때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내 글쓰기 성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들게 써 놓은 글 마저 지우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때는 이제는 다른 식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달리기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긍정적 글쓰기의 세계를 비로소 열렸다. 달리기를 하면서 생각나는 글의 소재들은 주로 밝고 희망적이다.



사진에 대한 관심이 생기다.


처음에는 달리기 기록을 앱이 보여주는 정보로만 남겼으나 매일 달리다 보니 그것도 슬슬 지루해졌다. 내 달리기에 대해 나만의 아카이브를 남기고 싶어 졌고 그래서 직접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당연히 사진을 찍거나 찍히거나가 모두 어색한 나로서는 아직도 꽤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마저도 '매일매일'이 갖는 에너지에 금방 설득당하는 듯하다. 사진 찍기의 시작이 SNS 업로드를 위한 노력이었다면 이제는 좀 더 나은 사진에 대한 욕심도 생긴다. 언젠가 카메라를 메고 경치 좋은 곳으로 달리기 출사 (*사진이나 영상을 찍기 위해 야외로 나가는 것)를 가보고 싶다.   



생각과 생활의 변화는 삶의 질을 높인다. 


새벽에 하는 달리기는 격렬한 운동이지만 차분한 명상이기도 하다. 때로는 새벽길을 그냥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새벽 달리기로 시작하는 하루는 비단 더 많은 물리적 시간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충만한 하루를 경험하게 한다. 쫓기는 삶이 아니라 내

가 조정하는 삶을 사는 기분은 내가 매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운동하면 입맛이 좋아진다는데 이것은 삶의 맛이 뚜렷해지는 기분이다. 




주절주절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달리기에 대해 얘기하라면 끝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는 긍정적 변화들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건들과 변화들도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설레고 흥분된다. 매일 달리기 30일을 달성한 오늘, 


나는 다시 매일 달리기 30일을 다짐한다. 


<2020년 10월 2일 매일 달리기 30일 달성 기념, 내 30일 중 가장 긴 거리를 함께 달린 친구들>

    



이미지 : https://www.instagram.com/cx3_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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