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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황금빛 밀밭

얻은 것이 없는 시간은 없다

by 제이린 Jayleen




엄마가 알려준 그 과일가게는 ‘사과’만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요즘에만 나온다는 연둣빛 시나노 골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나서,
청송사과의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에 빠졌다.


냉장고에 똑떨어진 그 달큼함을 채우려 찾아간 그 과일가게가 하필 일찍 문을 닫아서,
도리 없이 들르게 된 차선책의 과일집은 하필 그 만두가게 옆이었다.




넉살 좋던 그가 늘 떡볶이까지 덤으로 받아오던 그 집.
사장님과 눈이 마주치면 남편의 안부를 물어볼까,
모자를 꾹 눌러쓰고 앞만 보며 걸었다.


차가워진 초저녁 바람이 가슴을 뚫고 등을 밀며 지나갔다.



그때 이어폰에서 이소라의〈바람이 분다>가 흘러나왔다면,
제아무리 스쿼트로 다져진 허벅지 근육이라도
시장 바닥에 주저앉았을지 몰랐다.





와인과 치즈로 완벽해진 독서시간



얼마 전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한 동화작가가 ‘어린 왕자’를 60번 넘게 읽은 사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말하길, 읽을 때마다 마음이 달라진다고 했다.



이제 막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졌는데
어린왕자가 별을 떠나야 할 때,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어린왕자는 여우를 길들여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어린 왕자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우가 말했다.

“아아! 난 울어버릴 것만 같아”

“나도 그래.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난 네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네가 길들여 달라고 했잖아. “

“그래 네 말이 맞아.”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지금 울려고 하잖아.”
“그래. 정말 그래.”

“그럼 넌 아무것도 얻은 게 없잖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황금빛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거야.”



결혼 후 10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이 초라해 쓴웃음이 종종 난다.



여우는 황금빛 밀밭을 보면 어린왕자의 황금빛 머리를 떠올린다.
네 시에 올 어린왕자를 생각하며
세 시부터 행복해하던 자신의 부풀었던 가슴을 기억한다.
길들임과 헤어짐으로 달라져갔던 관계의 농도를 추억한다.

그리고 다른 별로 떠나는 어린왕자를 보며 울어버릴 것만 같았던
그 마음의 쓰라림을 되새긴다.



길들임과 헤어짐으로 내가 얻게 된
이 많은 추억과 감정의 서랍들.




어린왕자가 그리워했던 고향별의 장미꽃




“너에게 그 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시간을 내준 것 때문이야."
“난 내 꽃을 책임져야 해”



10년이란 시간을 내주고 가꾸었지만
이제는 책임질 꽃이 사라졌다.



그 대신,
늘 그가 네 판씩 사 오던 만두가게,
갯벌이 드넓던 해수욕장과 소금빵이 맛있던 카페,
성과급을 받으면 들렀던 아울렛,
김건모의〈빨간 우산>,
그의 작년 연말정산 속 카드 사용액,
변론기일과 판결문 정본,
그가 연주하던 그 악기의 음색.


이런 것들이 나의 황금빛 밀밭으로 남았다.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게 아니라는 여우의 말은
바늘처럼 아프면서도 보드라운 솜이불 같다.



마주하기 싫은 기억이 오지가 되어
내 마음 안에 큰 평수로 자리 잡았지만,
그마저도 ‘얻은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
- ‘걱정말아요 그대’ 중에서 (이적)



무르익은 벼가 햇살 아래 반짝이듯,

내 마음의 오지도 언젠가는 '황금빛 밭'으로

개간될 때를 기다려 본다.


가을까지 필요한 것은 햇살과 물,

그리고 시간.


도리 없는 세월의 영속함을

야속함이 아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나만의 햇살과 물을 열심히 공급해 보자.


황금빛 가을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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