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보다 중요한 건 마음의 회복력
회사에서 조직도 사진을 업데이트한다는데, 핸드폰 사진첩을 열어보니 참 사진이 없었다. 30대 중반부터는 사진 찍힐 기회가 있어도 '사진 별로 안 좋아해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사진 속의 내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최근 훌쩍 떠난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하나같이 다 잘 나왔다. 핸드폰 카메라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턱살, 볼살이 많은 나는 '찐 웃음'을 지으면 으레 두 턱이 등장한다. 인위적인 웃음을 살짝만 지어야 턱선을 지킬 수 있는데 살이 빠지고 나니 진짜 미소 속에서도 날카로운 턱선이 등장하는 것 아닌가. 살 빠지고 볼 일이라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바지가 하나같이 다 커졌는데 벨트가 없어서 벨트 몇 개를 장바구니에 담다가 추석대할인을 한다고 쿠폰을 쥐어줘서 어쩔 수 없이 쇼핑도 조금 하게 됐다. 체지방 몇 kg 빠진 게 옷핏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배송 온 옷들이 찰떡같이 잘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카드명세서를 스크롤하며 웃으며 울었다.
요즘 내가 마음에 드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체력이다.
13시간을 트래킹을 하고도 다음날 멀쩡했고, 야근 후에도 크게 피곤하지 않다. 정신적인 피로는 여전하지만, 몸이 버텨준다. 체력은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상태가 되었달까.
그건 올해 봄부터 다시 시작한 운동 덕분이다.
F45는 Functional45의 줄임말로 45분 동안 유산소와 근력을 섞어 진행하는 고강도 인터벌 프로그램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데서 오는 운동효율과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면서 적당히 변주를 주는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꾸준히 하니 근육이 붙고, 근육이 붙으니 마음도 버텨졌다.
8월엔 욕심내서 고중량 데드리프트를 하다 허리를 다쳤다. 한 달간 '운동금지령'이 떨어졌지만, 매일 저녁 밖으로 나갔다. 운동을 못 하니 걷기로 대체했다. 결과적으로 매일 만 보 이상 걷게 되는 결과를 얻었지만, 사실 침울해지는 자신을 건져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올해 초부터 여름까지 나는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상상도 못 했던 사건과 맞서고 홀로 서는 과정에서 아무리 긍정적인 나라도 감정의 파도를 피할 수 없었다
가족끼리 단란하게 모이는 저녁이나 나들이를 가는 주말이 되면 과거의 미로에 갇히곤 했다. 자기 연민이라는 회오리 입구에서 서성일 때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음악을 친구 삼아 걷고 또 걸었다. 아파트 단지가 지겨워지면, 목적지를 정하고 걸었다. 어떤 날은 빵을 좋아하는 감기 걸린 직장 후배를 위해 편도 30분 거리에 있는 빵집을 다녀오기도 했고, 가 보고 싶었던 우리 동네 대장 아파트를 다녀와 보기도 했다.
걷다 보면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폭풍 속에 있어도, 세상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매미는 울고 코스모스는 피고.
나는 그 사이에서 '이 세상에 속한 일원'이라는 안도감을 얻었다.
한 치 앞의 삶도 알 수 없다고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급격한 불운 앞에 닥쳐봐야만 그 말을 실감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지만 한 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현실 앞에 나는 통제 가능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몸을 단련하면서 내 인생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고 싶었던 것 아닐까.
무너지는 것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내가 '확실히 바꿀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요즘 그렇게 러닝을 하는 걸까. 다들 저마다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어서일까.
불안정한 직장, 과열된 경쟁, 인스타 속 비교의 피로.
내 의지로 잡히지 않는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운동만큼은 정직하다.
노력하면 근육이 붙고, 쉬면 사라지는 그 단순 명료함.
누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정함.
오직 나 스스로와 대면하는 돌봄의 시간.
운동은 외형의 변화뿐 아니라 내면을 복구하는 길잡이이다.
몸의 언어로 쓰는 자기 계발이랄까.
여전히 운동 전엔 망설인다.
(챗GPT는 나에게 '프로 망설임꾼'이라 불렀다)
운동이 귀찮은 날도 많다.
하지만 내 인생에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하나라도 가지려면 오늘도 신발끈을 묶어야 한다.
5km 러닝이 가벼워졌다는 건 내 몸이, 내 마음이 성장했다는 뜻이다.
운동은 자존감을 이론이 아니라 체감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귀차니즘이 밀려오는 날이 오더라도, 지난 반년 동안 내 마음의 근육을 붙여준 그 시간을 기억하며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맬 것이다.
오늘 한 걸음 준비해서, 내일 또 뛸 수 있도록.
그러다 보면, 한여름이 있었냐는 듯 어느덧 서늘한 아침공기가 찾아오듯이,
내 삶에도 결실의 가을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