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는 시드니의 한적한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습니다.
초콜릿 파우더가 듬뿍 뿌려진 카푸치노를 마시며,
오전 10시의 햇빛과 시원한 공기를 즐기고 있죠.
부러우시죠?
오늘로 시드니 여행 3일째를 맞았습니다.
인생 첫 호주, 그리고 제대로 된 ‘홀로 여행’입니다.
지난 6월의 일본 트래킹은 패키지여행이었으니
진짜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하긴 어려웠습니다.
올해 인생의 큰 격랑을 겪고 난 뒤,
“이젠 나를 위해 돈 좀 써보자”는 마음으로
하반기엔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여행을 다니고 있네요.
살기 좋은 도시로 늘 상위권에 꼽히는 호주.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마음을 안고
호기롭게 시드니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첫날엔 아침 9시에 호텔에 짐을 맡기고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도 보고, 맛있는 점심도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즐기며 2만 보 넘게 걸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녁이 되자 기분이 가라앉았습니다.
여행 일정표를 들여다보고, 저장해 둔 맛집을 확인하고,
가야 할 곳을 분주히 찾던 그 피로감 때문이었을까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남았습니다.
둘째 날 아침은 조금 다르게 시작했습니다.
7시에 일어나 러닝화를 신고 나섰습니다.
어제 그 오페라하우스로 향하는 길이
이제는 조금 낯익고 따뜻하게 느껴졌죠.
같은 공간의 아침을 맞이하니
시드니가 비로소 내 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숙소 근처의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글 평점도, 리뷰 수도 별로였지만
이번엔 내 ‘직감’을 믿기로 했습니다.
주문한 Turkish Eggs와 Long Black의 조합은 완벽했습니다.
통창 너머로 시원하게 들어오는 공기,
잔잔히 흐르는 재즈풍 BGM,
그 사이로 지나가는 시드니 사람들의 느긋한 걸음.
그제야 ‘현재’에 머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첫날의 나라면
1시부터 시작하는 일일투어 전에
시드니 대학교라도 들르려고 부지런히 움직였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더군요.
여행의 만족감은 ‘현재에 머무는 여유’에서 온다는 걸.
햇빛의 향 30%, 습도 없는 상쾌한 바람 30%,
그리고 적당한 여유와 밝은 에너지 40%.
그 조화가 만들어내는 시드니의 아침 공기 속에서
마음이 조용히 충전되는 걸 느꼈습니다.
오후엔 예약해 둔 일일투어에 참여했습니다.
20명이 넘는 그룹 중 나만 혼자였지만
의외로 그 고독이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가이드가 예정에 없던 빈티지 마을로 데려가 주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작은 서점은 선물 같았어요.
나무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마음이 잔잔히 평온해졌습니다.
머무를 수 있는 한 오래 머물다
읽을 수 있을 만한 책 한 권과 엽서를 품에 안고 나왔습니다.
모두가 줄을 서서 가이드가 추천한 식당으로 향할 때,
저는 구글맵을 열어 평점은 괜찮지만 조금 먼 일식당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에서 제 인생 최고의 Spring Roll을 만났습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진정한 ‘겉바속촉’의 끝판왕.
국물에 부스러기가 떨어져도 여전히 바삭함을 유지하더군요.
너무 놀라서 “This is crazy!”라고 외쳤더니
서버가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달려오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예상치 못한 선물 같은 순간들은
언제나 정형화된 루트가 아닌, 내 직감을 믿을 때 찾아옵니다.
그리고 오늘, 시드니 여행 3일째 아침.
이번엔 Centennial Park까지 달렸습니다.
공원에 가까워질수록 도시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예쁜 카펫 가게, 책과 와인을 함께 즐기는 카페,
운동하는 사람들과 대형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넓은 잔디 위를 뛰노는 개들과
러닝 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평화로웠습니다.
공원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습니다.
벤치에 앉아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다가
결국 러닝을 마저 이어가 숙소까지 7km 완주했습니다.
지금은 어제 들렀던 ‘느좋카페’ 테라스에 앉아
이 글을 쓰며 여행을 곱씹고 있습니다.
‘나다움’이란 이런 걸까요?
의외로 내가 언제 행복한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머리로는 몰라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을 따라가 보는 일.
삶이 버거워질 때,
가끔은 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참 유용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아무리 멋진 휴양지라도
‘나다움’이 스며들지 못한다면
그건 비싼 외출에 불과하겠죠.
조금 느리더라도 여행지에 녹아들기.
모두의 추천보다 내 직감을 믿어보기.
그리고 느긋함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기.
자카란다 나무의 보랏빛 아래에서
내가 내 공간을 벗어나 있음을,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답게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오늘은 첫날 만난 할아버지가 추천해 준
Manly Beach로 페리를 타고 가볼 예정입니다.
네이버엔 ‘Bondi Beach’를 가보라지만
이번에도 제 직감을 믿어봅니다.
지금 내 인생이 딱 그런 시기거든요.
모두가 가는 길 대신,
조금 다른 루트를 택해보는 전환기.
조금 더 나를 이해하고,
조금 더 나와 친해지는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확실한 건 하나,
카푸치노는 시나몬보다 초콜릿 파우더가 제 취향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