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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18. 2024

나의 춤

춤과 숨

  네 노트에 낙서처럼 기록된 문장과 이미지를 보는데 춤이 떠올랐어. 너는 네가 지은 문장인지, 어떤 책에서 옮겨 적어둔 문장인지 알기 힘들다 했지. 너의 글씨 하나하나는 춤을 시작하는 스텝처럼 보였어. 그 순간 사사프로젝트의 제시어는 춤으로 결정되었어. 


  규칙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발을 딛고 간들간들 요란하지 않은 움직임. 너의 글씨는 작은 생명의 씨앗 같기도 했어. 글의 씨앗. 빈 공간에 잠시 머물다 간 자취. 반복적인 리듬감이 순환하는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 나는 너의 글씨처럼 띄엄띄엄 움직이다 네가 그린 이미지처럼 누군가를 맞이하는 상상을 한다. 


 99P 

  남자는 여자를 본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남자는 춤을 상상한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의 걸음과 눈빛. 손. 포옹이었다가 스며들 듯 추는 춤. 여자는 남자에게 다가오지도 춤을 추지도 않았다. 단지 여자는 옷을 벗었고 여자가 벗어놓은 옷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말처럼. 

  

  여자는 알몸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천정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는데, 숨을 쉴 때마다 잔잔히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르륵. 남자도 옷을 벗었다. 남자가 벗어놓은 옷들은 그제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남자도 알몸이 되었다. 서로의 호흡을 느끼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숨소리가 들렸다. 

  

  침묵 속에서 남자는 여자의 여자는 남자의 숨소리를 가늠했다. 고요해졌다. 숨소리마저도 아득해지고, 천장으로 뻗어나간 서로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두 그루의 나무. 바람이 오고 너인지 나인지 모를 엉킨 그림자. 숨을 주고받으며 자꾸만 자꾸만 서로의 뒤로 파고든다. 너인지 나인지 모를 숨을 쉰다.  


  쓰고 나서 보니, 춤과 숨은 닮은 것 같아. 글자의 형태도. 발음도, 침묵과 어울리는 움직임도. 숨이 차고 땀이 나도록 새벽까지 춤을 추던 때도 있었지. 많은 사람들, 요란한 음악 속에서도 춤을 추는 나는 격렬하면서도 고요했어. 말이 없는 상태로 정해진 동작 없이 몸을 움직이는 내맡김이 좋았어. 


  새벽녘에 춤을 추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몸이 축축 늘어졌음에도 심장은 팔딱대더라. 춤을 추면 숨이 트였어. 언젠가부터 남자를 만나면, 함께 춤을 추는 상상을 해봐. 시작은 혼자야. 망설임이었다가 흔들림이었다가 둘이 결합되기도 해. 음악 없이도 몸을 밀착하며 리듬에 몸을 실어. 


  해가 지고,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출렁이다가 잔잔해지고, 사람은 가고, 바다만 남지. 바다를 바라보는 너와 나의 뒷모습. 바다에 들어가면 절로 춤이 되잖아. 그와 나는 춤을 출 수 있을까.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저무는 사람 

 

저무는 자세로 앉아 있다 

아침부터 저무는 자세라면 종일 저물다 말 것이다 


예언자처럼 생각하고 춤을 추자 손을 내밀었더니

겨우 손은 잡고 일어서는데 바로 손을 놓는다 

다시 저무는 자세로 돌아왔다


매일 다른 책을 읽는다 매일 같은 날 같아서

바닥에 앉았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엎드렸다가 


살고 싶은 문장 하나 없이 

저무는 날을 보내지 않으려고 자세를 바꾼다


읽는 사람 그다음은 쓰는 사람인가 

그러면 좋겠지만 읽는 사람 그다음은 

저무는 사람이다 


읽는 동안 날이 저문다 

저무는 자세로 

저무는 사람이 된다


저무는 시간이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몰을 보다 간다 


저무는 사람은 

오늘 읽었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춤춰요


남자는 집을 나간다 

여자가 춤춰요 손 내밀면

남자는 춤을 추거나 집을 나가기로 했다


여자는 텅 빈 방에서 춤을 춘다

빛이 저문다 


오늘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어제 읽었던 내용이다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다


아니, 미완성일지라도,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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