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Mar 11. 2024

너의 짓

바보짓

  도서관에 가고 있었어. 여름에 가깝구나. 생각하며 걷는데 너에게 전화가 왔어. 너는 저녁에 운동장을 뱅뱅 도는데 "책을 짓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왔고, 책 짓는 사람이 되고 싶다 했어. 꿈이나 희망이라 말해도 좋을까. 앞날에 대한 막연함이 가시고, 빛이 들어오는 느낌. 그 들뜸이 내게도 전달되었어. 


  “책 짓는 사람입니다.” 

  너는 타인 앞에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어. 순간 그 모습을 상상했는데, 상상이 필요 없을 만큼 상상이 잘 되더라. 지금까지 너는 꾸준히 책을 읽고, 만들어왔잖아. 타인과 만나서 도란도란 삶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근차근 한 장 한 장 삶의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지어가는 일. 네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기록하고 시간을 보내는 전 과정이 책을 짓는 일이겠지. 너는 짓는다는 말이 좋다며 ‘짓’의 사전적 의미도 찾아 보냈지. 


  *짓 : 몸을 놀려 움직이는 동작 

 

  “짓으로 할래.” 

  사사프로젝트의 세 번째 제시어는 ‘짓’이 되었어. 아, 이거 쉽지 않겠구나. 짓. 짓. 짓. 뻘짓 많이 하겠는데. 뭘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리라는 예감. 적중. 코로나 확진까지. 황망했어. 틈 날 때마다 짓으로 뭘 쓰지? 고민하는 짓거리가 시작되었지. 노트북을 켜면 뭐라도 쓰게 되지 않을까. 싶어 켰다 끄는 짓을 반복했어. 한 줄도 못 썼지. 이번 제시어는 '짓'은 깨끗이 포기해야 하나. 


  그런데 오늘 아침 (4월 21일 목요일) 네게 문자가 왔어. 책의 한 페이지를 찍어 보낸 사진이었어. 그 한 페이지 내용이 마음에 들어 어떤 책인지 물었는데, 민망하게도 내가 너에게 전화통화로 낭독까지 해준 책이었어. 끝까지 꽤 열심히 읽은 책이었는데 어쩜 그리도 까맣게 잊었을까. 망각보다는 치매가 어울리는 나이를 향해 가고 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엄마가 뭐라셔?”라고 묻는다. 클레망스는 “별일 없느냐고, 우리가 여전히 잘 지내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그렇다고, 내가 여전히 커다란 바보와 함께 바보 같은 짓들을 한다고 말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화박스에서 나와 웃음 가득한 재미있는 놀이들을 다시 시작한다. 

  죽은 자들에게 말하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단 한 가지뿐이다.

  

  변함없이 계속 살아가라. 

  더욱더 잘 살아가라.

  무엇보다 악을 행하지 말고 웃음을 잃지 말라. 

-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 中에서 


  내가 여전히 커다란 바보와 함께 바보 같은 짓들을 한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전화박스에서 나와 웃음 가득한 재미있는 놀이들을 다시 시작한다


   이 두 문장에서 나의 바보 같은 짓이 떠올랐어. 

 

  나의 바보 같은 짓_1 

  교과목 성적이 평균 이하일 때, 반 전체 성적이 안 좋았을 때, 쪽지 시험을 못 봤을 때, 떠들었을 때, 청소가 엉망이었을 때, 숙제를 안 해 왔을 때 별별 이유로 손바닥을 맞았다. 그땐, 툭하면 맞았다. 기왕 맞을 거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아이도 있었고, 선생님이 때리다 보면 힘이 빠질 것이고 나중에 맞을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한 번에 맞지 못하는 아이였다. 손바닥을 내밀고 있다가 선생님이 손바닥을 때리기 바로 직전의 타이밍에 손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 수차례 손바닥을 내밀었다가 당기는 일을 반복해야만 겨우 손바닥을 맞을 수 있었다. 맞기도 전에 겁에 질려 울먹이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웃기도 했고, 빨리 맞는 게 낫다며 응원을 해주기도 했다. 도무지 손바닥 맞기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막상 맞고 나면, 내가 예상한 아픔보다 덜 했고, 다음에는 "한 번에 맞자." 결심해 봐야 소용없었다. 선생님은 이번에는 절대 손바닥을 피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나는 알겠다고 눈을 질끈 감지만, 방금 전의 타협이 무색하게 회초리가 올려지면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빼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짓이다. 한 번에 맞지 못하는 게 창피해서라도 참고 맞았을 텐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손바닥을 딱, 맞는 그 순간의 공포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피할 때까지 피하다 맞았다. 나중에는 내가 맞으러 나가면 반 친구들은 기대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배우가 반 친구들은 관객이 되었다. 


  겁에 질려 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쿡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친구들이 많았다. 관객의 웃음은 무대 위에 있던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고 친구들이 웃는 게 좋았다. 바보짓이 놀이로 변주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바보짓은 늘 따라다닌다. 좋게 말하면 엉뚱하고 독특하게 볼 수 있지만, 상식을 벗어난 경우가 많다. 바보짓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웃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바보 같은 짓_2 


  너는 나의 바보짓에 웃는 사람이었어. 


  너와 선암사에서 숙박을 할 때도, 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지. 비어있음에 가까운 아담한 방. 호젓한 방에 다기세트가 있었어. 마치 그 방의 주인은 너와 내가 아니라, 그 다기세트인 것만 같았어. 그런 마음에 압도된 걸까. 다기세트는 내게 묘한 긴장감을 주었어. 


  차통에 있는 녹차를 찻주전자에 덜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되겠다. 시뮬레이션까지 돌렸는데... (삐삐삐삐. 고장) 차통 뚜껑을 열고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붓고 말았지. 뭔가 잘 못 되었다고 알아차린 순간 나는 당황해서 얼음. 


  상황을 단번에 알아차린 너는 정말 데굴데굴 구르면서 까르르 웃었지. 배꼽 쥐고 웃는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어. 저렇게까지 웃긴가. 싶으면서도 저렇게까지 웃겼어. 나도 덩달아 웃었어. 두고두고 내려 마실 수 있는 차를 한 방에 몰아 마셔야 했지. 


  네 말대로 마음이 너무 앞서버렸어. 굳이 내가 주전자를 담당할 필요도 없었는데... 

  

  시간을 지체할수록 녹차는 떫어지고 진하게 우려졌지. 우리는 급하게 녹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어. 내가 산통을 깨서 은은한 녹차 향을 음미하며, 고요하게 마실 수는 없었지만, 몸을 옹크리고 데굴데굴 구르는 네 모습을 보는 게 좋았어. 순식간에 중년에서 소녀로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 느낌. 지금에서야 고백하자면 나의 바보짓에 데굴데굴 웃어줘서 고마웠어. 만약, 네가 웃지 않았다면 나 때문에 맛없게 마신 떫은 녹차맛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을 거야. 


  참, 너는 손바닥을 잘 맞던 아이였니? 너와 내가 같은 반이고, 손바닥 못 맞는 내 덜떨어진 모습을 보았대도 미소년 외모 뿜뿜하는 너와 나는 친구였을 거야. 그러고 보니, 나이가 들수록, 그다지 웃을 일이 생기지 않는 것 같아. 너도 마음이 앞서면 바보짓이 가능하려나. 너만 아는 너의 바보짓은 어떤 때 나오려나. 다음에 너를 만나면, 너의 바보짓을 보고 싶어.


  바보짓 추가 :  돌솥밥 먹을 때, 1. 돌솥에 있는 고슬고슬한 밥을 밥그릇에 적당량 퍼두고 2. 밑에 눌은 누룽지에 3. 뜨거운 물을 붓는 게 순서잖아. 옆 사람이 화장실 간 사이에 돌솥밥이 나왔어. (어째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멈춰. 굳이 너가 배려하지 않아도 돼! 주전자를 내려 놓아! 무슨 소리야.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옆 사람 돌솥밥 뚜껑을 연다. (밥을 따로 퍼 담아 놓지 않고무작정 뜨거운 물을 붓는다. 화장실 갔다가 돌아온 그 사람은 내가 만들어 놓은 죽밥을 본 뒤 벼락 같이 화를 낸다. 옆 사람과 나는 이전 관계로 돌아가지 못했어. 그 후로 나는 돌솥밥을 보면 많이 긴장 돼. 그리고 남보다 먼저 주전자를 들지 않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