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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Feb 26. 2024

너의 별

라스트르 l′astre

라스트르*


  그곳에 간 이유를 묻는다면 소파, 의자, 바다 순서로 말할 것이다. 정작 중요한 이유는 감추고 사물들의 이름을 그럴싸하게 늘어놓으며 사진 한 장을 보여주겠지. 


  바다를 향해 놓인 빛바랜 보라색 소파와 낡은 나무 의자. 


  “저기 앉고 싶어서 갔어.” 

  여행은 거짓말로부터 시작 돼.   


  너는 라스트르에서 여행자를 위한 작은 숙소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숙소에 체크인 시간에 맞춰 3시쯤 도착했다. 너는 외부에 있다며 숙소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숙소. 한쪽 벽면에는 그동안 이곳에 다녀간 여행자들의 메모와 맛집, 산책 코스 등 라스트르 여행정보가 붙어있었다. 책꽂이 앞에 쪼그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책 제목을 쭉 훑어보았지만 읽고 싶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불길했다. 딱, 한 권만 하는 마음으로 샅샅이 여러 번 봐도 없었다. 책을 읽으며 너를 기다리는 일은 되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푼 지 두 시간 여 지났을 때 네가 왔다. 문이 열리고 드디어 너와의 첫 대면. 바깥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훅 들어왔다. 내 집인 양 편한 옷을 입은 내가 두툼한 외투를 입은 너를 맞이했다. 내가 주인 같고 네가 손님 같다고 생각했다. 메고 있던 묵직한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자 너는 소년의 얼굴로 변했다.  


  너는 추운데 보일러를 왜 돌리지 않았냐며 보일러부터 틀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가방 앞 지퍼를 열더니 쿠키 하나를 꺼내 건넸다. 받자마자 우적우적 씹었다. 


  그 후 나는 물기 없이 마르고 쩍쩍 갈라진 땅을 연상시키는 코끼리로 변했다. 육중한 데다 주름졌다. 너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너와 눈을 맞추는 족족 주름이 생기는 이상한 상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하필, 숙소의 손님은 나 혼자였다. 너는 라스트르의 맛있는 커피 집. 가볼 만한 곳 등 여행 정보를 알려줬다. 아. 네. 가봐야겠네요. 너의 말을 흘려들으며 형식적으로 대꾸했다. 너의 일을 아주 성실히 친절하게 하고 있었다. 일을 하는 느낌이 불편했다. 그저 조용히 너와 있고 싶었다. 


  누가 봐도 우리는 말이 없는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말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서로에게 무례한 일이라고 되는 양. 이 말 저 말 늘어놓았다. 너와 더 있고 싶은데, 대화가 끊어지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정리해야 하니, 계속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곳에 오기 전 거쳐 온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불쑥 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어린 왕자 같아요! 이 별 저 별을 떠도는” 

 

  어린 왕자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제야 나는 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와 대화를 할수록 나이를 먹어가는 느낌이었는데 어린, 왕자. 라니. 불쑥 용기가 생겼다. 용기는 불쑥 생기기도 하고 불쑥 꺼지기도 한다. 너는 지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어린 왕자는 몇 번을 읽어봐도 재미가 없어요.” 

  "..."


  만약, 이 순간을 무대로 옮긴다면... 이 희곡에는 어떤 지시문이 어울릴까. (정적. 암전)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몰보다 더 빠르게 그와 나의 대화도 온기와 빛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아예 어둑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외투를 입었다. 


  "어디 가시게요?" 

  "바다에 나가보려고요."

  "라스트르는 밤이 더 좋아요. 별이 보일 거예요." 

  

  거짓말을 약속인 것처럼 지키러 나가는 것 같아서 조금 민망했다. 소파와 나무의자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다니. 거짓말로 시작된 여행. 거짓말은 용납 못 하는 사람처럼 굴면서 살아왔는데 너를 보러 오는 데에는 거짓말을 너무 쉽게 써버렸다.


  어떤 사물에는 감정 이입이 된다. 도로가에 버려진 혹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놓여있는 낡은 의자를 보면 잠시 멈추게 되고, 명명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든다. 어디서 비롯되는 감정인지 모르겠으나 의자가 보이면, 동요되고 쉽사리 지나치지 못한다. 


  라스트르를 향해 놓인 소파와 의자가 낡은 탓일까. 라스트르는 허기져 보였다. 바닷가를 향해 있는 1인용 소파와 의자. 허름한 밤은 허기를 삼켜버리고, 내 몸의 육중함과 주름도 가져갔다. 소파에 앉으니 몸이 급작스레 푹 꺼졌다. 예상치 못한 탓에 웃음이 터졌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혹시라도 의자가 주저앉을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살짝 엉덩이를 댔다. 소파나 의자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그들의 뒷모습을 스케치하는 사람으로 이곳에 살면 어떨까. 


  바다만 보고 있던 나는 너(나)를 보았다. 너(나)는 별을 보았다. 밤하늘 가득 별이었다. 밤하늘이 길이라면, 별들은 쉬어갈 수 있게 마련된 의자이면 어떨까. 그 별의 모든 이름은 라스트르. 소파와 의자, 바다. 너(나)와 나. 너(나)의 우주와 나(너)의 우주가 만나 침묵을 잉태한다, 침묵이 태어나 침묵한다. 너(나)와 나의 간격은 별자리가 된다. 중력을 벗어난 너의 자리와 나의 자리. 무중력 상태의 침묵이 생성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너(나)와 나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 


 꿈이다. 

 

  다음날 새벽, 라스트르 시장을 갔다가 아주 기이해 보이는 회색빛 주름진 생명체를 보았다. 문어와 꽃게 옆에 놓여 있어 바다생물이라고 추측했지, 따로 있었다면, 외계 생명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그 생명체의 생김새는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물끄덩 물끄덩 푹 퍼진 몸. 얼굴 표정은 어리숙하고 낙천적으로 생생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허락을 구하고 사진을 찍었다.

 

“뭐처럼 보여요?” 

주인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코끼리?” 

아주머니와 나는 서로 영문 모르는 얼굴을 마주 하며 웃었다. 내 눈에는 코끼리가 주르륵주르륵 무너지면 꼭 그런 모습일 것 같았다. 


  주인 없이 밖에 놓인 ㅢ자를 보면 라스트르로 간다. ㅢ자에 네가 앉는다. ㅢ자는 사람 몸과 닮았고, 뒷모습도 있다. 나는 ㅢ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너와의 대화는 기억나지 않고, 침묵하고 싶었던 순간만 남아있다. 


  너는 라스트르에 왜 왔냐고 물었다. 준비해 둔 사진을 꺼냈다. 소파, ㅢ자, 바다. 라스트르에 간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면 고백처럼 들릴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너, 소파, 의자, 바다의 뒷모습을 써내고 싶었다.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본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다. 소파, 의자, 너와 함께 별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장면.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너와 함께 별을 보았다면 침묵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는 가정법으로 시작한 문장에 불과하다. 


  나는 나 자신을 이제야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고, 너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며 불가능하다는 뉘앙스로 반문했다. 아직도 너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까. 그 믿음이 무너지면 너는 달라질까. 나는 라스트르에서 나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랬다면 너와의 침묵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침묵은 다음 여행으로 미뤄졌다.    


 *라스트르 _ l′astre : 천체, 별 2. 점성술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과연 라스트르를 완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다 보니 의혹투성이인 이야기가 되어버렸어. 라스트르를 쓰면서 네가 썼을 별에 대해서도 상상해. ‘궁디’가 생각났어. 궁디... 새까만 씨앗 같은 눈을 가진, 복실복실 귀여운 햄스터. 베이지와 아이보리 톤이 섞인 색감의 보드라운 털. 털 빛깔이 이뻤어.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보드랍게 어루만져주는 마법 털 뭉치. 

  

  나는 햄스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궁디는 사랑스러웠어. 궁디가 죽고, 너는 궁디를 햇살 좋은 곳에 묻어주고, 해바라기 씨도 뿌렸다고 했어. 산책을 할 때마다 궁디를 본다는 너. 별이 된다는 건. 내게 그런 과정으로 정리되었어. 

  

  그런 글을 쓸 수는 없었지만. 네가 지금도 궁디를 보는 일은 별을 보는 일과 같을지도 몰라. 네가 어떤 내용으로 별을 썼던, 나에게는 궁디로 읽힐 것 같아. 궁디야~ 궁디야~ 속삭이면 별이 뜰 것만 같은 한낮이야.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좀 걸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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