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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Apr 01. 2024

나의 꿈

인도와 야크 

  '꿈'과 '길' 중 어떤 단어를 선택할까. 갈림길에서 고민 중이었는데 어젯밤 꿈에 네가 나왔어. 그래서 꿈으로 결정했어. 보통은 어른이 되면서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 어린 시절보다 흐릿해지고 스토리가 빈약해지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꿈을 꾸고 기억해. 꿈은 망각을 향해 가다가 잠시 기억 속에 머물러주는 것 같아. 넌지시 말을 걸어와. 꿈을 망각으로 보내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기록을 해두지만, 신기하게도 몇몇 꿈을 제외하고는 기록 자체도 망각으로 향하는 다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너의 집이었는데, 너는 나에게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바삐 갔어. 나는 커피를 찾느라, 또 커피를 분쇄하느라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지. 이거 하려고 하면 이게 꼬이고, 저거 하려고 하면 이게 마음에 걸려서 안절부절못하는 상황. 단순한 일인데도 커피 내리는 일이 한없이 복잡했어. 


  주방 한가득 커피며 도구며 늘어놓고 있는데 네가 왔어. 어쩔 줄 몰라하며 네게 변명을 늘어놓고, 너는 내가 어질러 놓은 주방 꼴을 보고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말했어. 

  “괜찮아. 다시 하면 돼.”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가만 생각해 보니, 네가 내 꿈에 나온 적은 처음인 거 같아. 

 

   너 이전에 꿈 이야기를 주고받던 친구 J가 있었어. J와 잠잘 때 꾸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우리에게는 공동의 꿈이 생겼어. 인도. 인도 여행.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도에 가겠다는 꿈을 품고 학습지 교사를 시작했어.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갈 즈음 일하느라 꿈과 인도는 희미해졌지. 그때, J에게서 연락이 왔지. 아프고 힘 빠진 목소리로 J가 말했어. 


  “나 인도야. 물이 안 맞아서 계속 설사를 하고 있어.” 


  훅, 인도가 되살아났어. 인도에서 설사를 한다. 그게 그렇게 부러웠어. 나도 인도에서 아프고 설사하고 싶었어. 물이 안 맞는 느낌도 궁금했어. 얼마 뒤 나는 학습지 교사를 그만두고, 인도여행을 준비했지. 처음으로 어디에 그것도 아주 멀리 가겠다는 꿈을 이뤘어. 꿈을 이룬 길은 정말 꿈결 같았어. J의 설사 덕분에 꿈길을 걷게 된 거야. 놀랍게도 나는 인도의 물이 너무 잘 맞았고, 설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만약, 인도에 가지 못했다면, 계속 설사하고 싶은, 꿈같은 기분을 남겨놓은 채 살고 있을지도 몰라. 


  중학교 때, 한 동안 내 꿈속을 장악하던 털짐승이 있었다. 소라고 하기에는 털이 바닥까지 쓸릴 정도로 길었고 (기억은 부풀어지기 십상), 상아 마냥 큰 뿔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본 적 없는 낯선 짐승이라 더 무서웠다. 그 짐승은 나를 향해 막무가내로 돌진했고 나는 겁에 질려서 얼어붙었다. 돌진하던 짐승은 갑자기 직립했고 두 다리는 팔로 변해 내 심장을 뽑아 갔다. 

  

  나의 심장이 쑤욱 당겨져 뽑혀 나가는 느낌이 너무도 생생했다. 피는 분사되듯 사방으로 퍼지고, 꿈에서 깼다. 공포스러웠다.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반복해서 꿨다. 영문도 모르는 채 짐승에게 당하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공포, 두려움이었으나 꿈을 반복해서 꿀수록 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꿈에서 낭자한 붉은 피를 보는 것, 펄떡이는 심장을 보는 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른이 된 후로도 짐승 꿈의 강렬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 힘 빠져 걷던 중 지하철역 광고판을 보았다. 오소소. 소름부터 돋았다. 꿈속 짐승을 거기서 만났다. 블랙야크. 야크였다. 


  인도 북부지방에 서식하는 야크. 꿈속 야크가 스물일곱의 나를 인도로 데려간 것이 아닐까. 믿기지 않지만 믿어졌다. 인도에서 나는 치열하게 팔딱였다. 인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들은 나를 보고 인도사람 같다고 했다. 내 보기에 나는 검고, 털이 긴 야크였다. 

 

  요즘에도 가끔 야크 꿈을 떠올리는데 이제 공포보다는 오히려 심장의 펄떡임. 살아있는 야생의 생명력, 원초적 에너지를 느낀다.  


  인도 여행 전 어딜 가나 먼 곳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북소리가 따라다녔다. 몸 어딘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간질간질했다. 다른 세계와 만나기 전 몸이 알아서 신호를 보내고 준비운동을 하는 것 같달까. 여전히 꿈꾼다. 여기를 떠나 그곳에 있는 것. 그곳에서 나와 타인을 만나는 것. 그곳을 떠나 이곳에 돌아오면 이곳이 이곳이 아니고, 내가 내가 아니다. 그것만큼 신성하고 놀라운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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