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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Apr 08. 2024

너의 뱀

뱀뱀뱀부

  뜨아. 너의 제시어 뱀. 할 말 없는데 말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괜찮아. 걱정 마. 이럴 때 쓰는 수법이 있지. 말놀이. 


  뱀 하면 뱀부지. 

 

  봄철이면, 어김없이 죽순의식을 치른다. 대밭에 가서 죽순을 뚝 뿌대고, 돌돌 말린 거친 겉껍질을 벗겨낸다. 한 겹 한 겹 벗겨질수록 옥수수 냄새가 난다. 겉껍질을 다 정리하면 원뿔형 계단 모양으로 순하디 순한 레몬빛이 드러난다. 죽순을 보면 마음이 유순해진다. 유순죽순. 


  유순죽순에서 비가 오면 죽순이 마구 자란다 해서 雨後죽순인데, 죽순이 한창일 때는 비가 안 와도 우후. 우후. 우후 소리가 나올 만큼 죽순이 쑥쑥 자라 있다. 쑥쑥죽순. 더 하다가는 죽 쑤겠네. 


  다시 죽순의식으로 돌아와~ 죽순 알맹이. 죽순을 데치기 좋은 크기로 쪼개는 일이 남았다. 칼끝이 죽순 마디마디를 통과하며 잘릴 때마다 손바닥, 손끝에 또동또동 전달되는 부드러운 진동. 죽순 손질과정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계. 손질된 죽순은 데쳐서 물에 잠시 담가놓고 물기를 거른 다음 냉동실에 넣어서 보관한다. 

 

  수수곰돌씨를 만난 김에 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달랬다. 대밭에서 대나무 뿌리인 줄 알고 발로 걷어찼다가 뱀이어서, 깜짝 놀랐다한다. 꽤 리얼하게 상황을 전달한다. 뱀은 혀를 날름대며 자신을 째려보았고 뱀과 눈이 딱 맞았다며. 당시 뱀의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뭘 그렇게까지)

 

  뒤늦게 깨닫는다. 

  이 짧은 에피소드에도 뱀 하니 뱀부(대나무)가 나온다. 

  뱀, 하면 뱀부부부부부부부 부부? 이런... 말장난은 위험해. 

 

  뱀은 소리로 더 많이 본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무렵, 뒷산을 산책할 때면 심심찮게 뱀의 소리를 듣는다. 뱀이 풀숲을 쓸며 지날 때 나는 소리만으로도 순식간에 겁을 먹는다. 뱀은 그저 지나갈 뿐인데, 나는 뒤로 물러선다. 자꾸 뱀뱀 하니 뱀이 의성어로 느껴지고 맴맴 우는 매미가 생각난다. 여름이면 나무에서 매미들이 요란하게 운다. 울음소리 때문에 매미의 존재를 인지한다. 매미 소리에 집중해 나무를 꼼꼼히 살펴보면 매미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뱀뱀뱀뱀뱀뱀 여름에 뱀이 울면, 좀 으스스한 여름이 되려나. 공포영화가 따로 필요 없으려나. 뱀도 뱀뱀뱀뱀 소리 내며 지나다닌다면, 조금 덜 무서울까. 혹시라도 부주의해서 우연히 뱀을 밟게 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겠다.

  

  뱀을 모르고 밟아놓고, 미안, 네가 거기 있는 줄 몰랐어. 해봐야 뱀은 알 길 없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물려고 하겠지. 만약 뱀이 정말 뱀뱀뱀뱀 소리를 낸다면,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뱀의 입장에서) 뱀이 나 여기 있소. 자신의 위치를 흘리고 다니는 셈이니. 먹이 사냥도 어려울 것이고, 뱀 사냥꾼과 천적에게 더 쉽게 잡힐 수 있겠다. (미안, 뱀 / 내 생각만 했네) 


  되도록 안 걷겠지만 풀숲을 걷게 될 때는 나 여기 있네, 인간이 먼저 뱀에게 신호를 주고 걸음을 옮기면 물릴 위험은 없을 듯. 뱀 입장에서도 덩치 큰 인간을 무서워할 테니. 


  이건 또 다른 이야긴데 뱀의 허물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과 우르르 걷고 있었는데 길 한가운데 뱀의 허물이 보란 듯 놓여있었다. 허물만 보고도 뱀을 본 마냥 놀라는 사람도 있었고, 징그럽다고 눈을 감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신기해서 자꾸 돌아보았다. 허물을 집어가고 싶었다. 버려진 집 같았다. 


  여자는 뱀의 허물을 모아

  겨울의 창에 촘촘히 붙였다 

  여자가 잠들면 

  허물은 뱀을 부른다

  허물로 돌아오는 뱀들

  허물 속에서 쉬어갈 수는 있지만

  머무를 수는 없다 

  벗어놓은 허물을 두고 

  또 다른 허물을 벗으러 가는 여정

  여자는 검지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뱀의 허물에 검지를 넣는다

  무언가를 관통하듯 

  여자는 허물을 모으러 나가고, 

  뱀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허물을 벗는지 알게 되었다 

  어떤 허물은 뱀보다 정교했다

  여자는 뱀이 허물을 벗는 모습이 되고 싶었다 

  여자는 여자를 벗고 몸이 된다 

  몸을 한 번 더 

  벗으면 춤이 되고 

  무언가를 관통하듯 

  허물을 벗고, 

  그곳에 들어가 숨고 싶었다 

  숨어 숨 쉬고 싶었다 

  여자는 허물을 보면 

  삶과 죽음이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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