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프로젝트_15_법
코르작의 마치우시 왕을 읽고 난 뒤 쓸게.
그런 법이 어딨을까. 싶겠지만 미루는 법도 제법 쓸데가 있다구!
너는 부처님 법문에 대한 글을 썼지 싶은데...
사사프로젝트_16_길
아빠가 콩밭에서 말벌에 정수리를 서너 방 넘게 쏘였다. 아빠는 머리만 쥐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했다. 엄마는 다급하게 울먹였다. 무서웠다. 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아빠가 진통제 맞는 동안, 나는 약을 타러 갔다. 설마, 했다. 병원 내 약국에서 약을 타고 나오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이리로 가면 되겠다가 전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이쪽으로도 가보고, 저쪽으로도 가봤지만, 내가 찾고 있는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내가 찾고 있는 입구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길을 잃기 위해 이 공간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
늦게 가면 성질 급한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것도 불안했다. 길 잃은 어리석음을 탓하면서 길을 찾느라 기진맥진해 갔다. 안경도 없어서 뵈는 게 없었다. 얼마간 이쪽저쪽을 헤매고 다니다가 안내하는 사람이 보여 상황을 설명했다. <약을 타러 왔다가 길을 잃었다. 응급실 중환자실로 들어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3층으로 올라가 보라고 했다.
3층, 그것만은 확실히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기웃대고 있는데 병동에서 보았던 간호사가 보였다. 구세주. 나는 간호사를 붙들고 병실로 돌아가는 길을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방향을 알려주려다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다시 구세주가 왔고 입구는 먼 데 있지 않았다. 열 걸음도 채 안 되는 곳이었다. 영상 CT실로 표기되어 있는 문이었다. 허탈했다. 저길 못 찾고 엉뚱한 곳을 헤매다니. 응급실이기 때문에 자동문 옆에 호출을 누르고 카드를 찍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간호사는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은인.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고아 아니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나를 찾는 방송이 나왔을 것이다. 문이 열렸고, 다행히 아빠가 보였다. 진통제를 다 맞고 이제 주삿바늘을 빼고 있었다. 집에 가면 되었다. 응급실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이 또 헷갈렸다. 아빠와 있으니 찾아졌다. 다행히 아빠도 벌에 쏘인 통증이 좀 가라앉았다.
확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이런 일에도 찬찬히 침착하게 대처하지 못하는데, 더 큰일이 닥치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겁이 났다. 살아가고는 있지만, 병원에서의 일처리 하나도 이렇게 허둥대는데,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길 텐데... 얼마나 많은 자책을 만들어갈지. 머릿속이 복잡하고 무거워졌다.
앞으로도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은 없다. 길을 찾을 자신도 없다. 모르면 물어물어 가야겠다. 창피해도 그 길 밖에 없구나 생각했다. 대학 때였다. 술집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길을 잃은 적도 있다. 다른 테이블에 기웃대다가, 선배 하나가 내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별로 취하지 않았는데, 다들 많이 취했다 생각했다.
오늘은 매 번 도서관 올 때마다 걸어오는 길인데도 더 가야 하나. 싶었다. 길 위에서는 여기야!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휴대폰을 쥐고 맵을 켜고 가지 않으면 안다고 생각했던 길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든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로 가야 하지. 방향감각도 상실하기 일쑤라서 돌고 돌게 된다.
너와 제주에서 걷던 길들은 대체로 참 편안했어. 네가 길을 알고, 네 옆에서 걸으니까. 너와 걷다가 먹었던 음식은 맛있었고. 나누던 대화도 깊고 즐거웠지.
길을 헤매는 게 싫은 투로 말했지만, 길을 헤매도 괜찮구나 느낀 적도 많았어. 헤매다 서랍장 같은 필요한 물건을 줍기도 했고, 헤매다 골목 여행이 되기도 했고, 헤매다 들어간 밥집이 맛있기도 했거든. 혼자 있을 때는 헤매도 괜찮은데 옆에 누가 있으면 헤매는 시간이 미안해지지. 누가 옆에 있으면 알던 길도 헤매게 되는 게 어이없지만. 오늘 쓴 글의 길도 이미 잃어버린 것 같다. (길을 '긿'이라고 써서 맞춤법 검사로 수정했다. 긿이 '길과 '잃다'의 합성어로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