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Jun 21. 2024

너의 꿀

 

  사루비아 꽃을 보면, 바로 혀끝부터 달달해진다. 주로 학교 가는 길에 꽃을 쏙쏙 뽑아 입에 물고 가다 잘근잘근 씹어 꽃봉오리의 끝부분을 달게 먹곤 했다. 친구들과 함께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었던 기억은 없다. 혼자일 때 사루비아를 챙겨 먹었다. 


  주로 혼자 일 때, 사루비아가 보였다. 조용히 몸을 구부려 사루비아로 다가가, 살짝 꽃대를 뽑았다. 그러고 나면, 마치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속이 가분했다. 누군가가 다 먹어버려 사루비아 꽃이 남아있지 않고, 꽃받침만 남아있을 때는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비밀을 공유한 친구가 비밀을 다른 친구에게 누설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느낌이랄까. 


  ‘사사프로젝트’ 열 번째 단어 ‘물’을 고스란히 잊고, 스물네 번째 제시어로 또 ‘물’ 해버렸네. 조금 민망하게 웃고, 다른 단어 ‘재’를 제시했지. 물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다시 돌아가 읽어보았어. 와닿지가 않네. 물에 대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구나 확인했어. 

 

  물, 말, 집, 뜻, 땀, 법, 길, 꿀...

  한 단어 제시어로 쓴 글들을 훑다가 ‘꿀’을 보게 되었고, 미완성의 자취만 남긴 꿀 페이지에 조금 더 머물러 보고 싶었지. 물을 신경 쓰다 꿀을 만나니, 꿀물로 시작한 아침이 떠올랐어.

 

  꿀, 꿀이 있었던 그날 밤과 아침. 더 정확히는 꿀과 물. 조금 더 보태면 꿀과 잠과 물. 혀 끝이 달았던 봄날.


  공연이 끝난 뒤, 뒤풀이가 계속 이어졌고 이미 대중교통은 다 끊어진 상태였다. 모두는 취기 오른 상태로 비틀대며 대학로 근처, 한성대 근방에서 자취하는 선배 제이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오르막길 힘들다 투덜대며 걷는 동안 다들 조금씩 술이 깨고 있었다. 제이 집은 역세권과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방 두 개. 방과 분리된 주방. 화장실도 꽤 널찍했다. 


  술을 마시다가 하나 둘 잠들기 시작했고 깨어있는 사람보다 잠든 사람이 더 많아지자, 제이는 술자리를 정리했다. 나도 거들었다. 제이는 싱크대 수납장을 열어 꿀통을 보여주며, 꿀물 타 먹으면 속이 풀릴 거라고 했다. 다정다감한 제이. 나는 내일 꼭 타 먹고 집에 가겠다 말하고 웃었다. 


  제이는 정말 성실한 배우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실에 일찍 나와 몸을 풀고, 대사 연습을 했다. 이미 역할과 대사가 몸에 다 배어있는데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본보기. 얼굴이 스님처럼 말갰다. 술자리 정리를 마치고 나도 몸을 뉘었다.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술에 취하지도 잠이 들지도 않았다. 여기서 잠든 선배들은 11시나 12시 즈음 일어나, 해장국을 먹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지하철 다니면 집에 가야지. 하고 눈만 감고 있었다. 


  첫 차 다닐 시간이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부스럭 누군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어? 이건 내 예상과 틀린 전개인데. 제이일 거라 생각했는데 연출이었다. 부지런하다고는 들었는데 정말이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가볍게 인사했다. 


  “꿀물 한 잔 드실래요?”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다. 마치 내가 집주인이고, 객을 대접하는 듯한 태도와 말. 나 자신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좋지.”

  연출은 잠이 덜 깬 얼빵한 표정으로 말했다. 

  따뜻한 꿀물보다는 시원한 게 나을 것 같아서, 생수에 꿀을 넣고 휘휘 저었다. 연출과 나는 꿀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달달하니 몸이 스르륵 풀리는 거 같았다. 

  

  “고마워. 잘 마셨다. 더 있을 거니?”

  “아니요. 첫차 다녀서 나가려고요.”

  “같이 나가자.”

  

  밤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아침 공기. 하늘은 맑았고,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걸음걸음이 가볍고 들떴다. 연출과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별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둘 다 새날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도 나도 옅은 미소를 머금고 휘날리는 벚꽃 속을 걸어 내려갔다. 어젯밤의 오르막길은 이미 까마득했고, 지금 걷고 있는 내리막길도 아득해져 갔다. 


  그날의 웰컴 티는 꿀물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