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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23. 2024

그리마와 지진

 

  벽에 다리가 길고 많은 벌레 한 마리가 붙어있었다. 지네는 아니었고 뭔가 소금쟁이스러웠다. 납작하고 호리호리하게 생겨서 잡아봄 직 했다. 얄풋했다. 통통해서 잡았을 때 몸이 터지는 느낌을 주는 벌레는 주로 못 본 척한다. 벌레에 관대한 편이다. 내 방에서 거미가 보여도 굳이 잡지 않는다. 


  하지만 다리 많고, 납작한 저것은 내가 잠들었을 때, 내 몸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상상이 너무도 쉽게 된다. 파리채를 가지고 오니, 저것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상상력이 또 한 번 가동된다. 파리채를 들고 구석진 곳을 살핀다. 수납 바구니 구석 틈에 콕 끼어있다. 긴 다리가 보였다. 


  마치 나와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꼼작 않고 있는 모습이 좀 웃겼다. 못 찾겠다 꾀꼬리... 를 부르는 대신 파리채로 다리 부근을 내리쳤다. 순간 파리채로는 저것을 잡을 수 없음을 알았다.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면, 틈새를 공략할 수 있는 다른 도구를 사용해야 했다. 


  종이를 단단하게 접었다. 틈새에 들어갈 수 있는 두께로. 그때까지도 저것은 그대로 거기 있었다. 잔뜩 겁먹은 저것을 겨냥해 종이를 틈새로 밀어 넣었다. 꾸욱. 벌레의 다리 한 짝이 떨어져 나왔다. 죽였지만, 찝찝했다. 상상되지 않았다면, 저것은 좀 더 생을 누렸을 것이다. 몹쓸 상상력.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았다. 어...어... 내 속에서 꿀렁꿀렁 파도가 친다. 멀미와 비슷하다. 울렁울렁. 분명 나의 내부에서 감지된 일인데, 내 몸 주변도 꿀렁인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사라진다. 


  지진이었다. 전북 부안에 4.8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의 진동이 내 안으로 흡수된 걸까. 지진을 느낀 것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전에는 쿵.이었다면 이번에는 꿀렁였다. 직선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곡선이었고, 고체가 아니라 액체상태였다. 


  엄마도 아빠도 지진을 느끼지 못했다 한다. 좀 멍했다. 좀 전에 죽인 다리 많고 납작한 저것이 아른댄다. 저것은 돈벌레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리마'였다. 사람을 잘 물지 않으며, 물더라도 독성이 별로 없어서 살짝 붉어지는 정도라 한다. 그리마가 바퀴벌레나 모기알을 먹기도 한다는데... 그냥 둘 걸 그랬다. 바퀴벌레가 보이면, 그리마가 그립지는 않더라도 생각날 것 같다. 그날의 지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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