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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l 13. 2024

그림책 자판기_01

빨간 나무 / 숀 탠 글 그림 / 김경연 옮김 / 풀빛

우울할 때 찾기 좋은 그림책 

빨간 나무 / 숀 탠 글 그림 / 김경연 옮김 / 풀빛


  나는 잘 숨는다. (숨바꼭질은 무서워했지만) 그런데 생각보다 숨기 좋은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숨기 좋은 곳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딜 가든 누구와 있든 계속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든다.  


  서울 살 때 대학로에 나가면 숨기 좋은 '책방이음'이라는 곳이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좀 걷다가 다시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면 있었다. 주로 희곡을 읽으러 갔다. 소극장이 많은 대학로에 있는 서점이라서 그랬을까. 대형서점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한 희곡집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 희곡을 읽었을 땐 무대 대사 지문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낯설었다. 읽다 보니, 현실보다 희곡 속 인물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희곡집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책은 버려도 시집과 희곡집은 버리지 못했다. 물리적인 집보다 희곡집이나 시집이 내게는 머물고 싶은 집은 맞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웅크리고 앉아 그림책을 꺼내 보았다. 숀 탠의 '빨간 나무'를 보다가 내 마음 같아서 차마 놓고 올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산 그림책이었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 거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빨간 나무> 중에서 


  숀 탠 '빨간 나무'의 첫 문장이다. 놀랐다.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내 마음을 다 아는 누군가를 만난 것만 같아서.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페이지마다 작고 빨간 나뭇잎 한 장을 찾고 눈 맞춘 뒤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때로는 자신도 모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빨간 나무> 중에서 


  글을 읽고, 그림을 보면서 작고 빨간 나뭇잎 찾기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가진 우울은 뒷전이었다. 다행히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잘 찾아졌다. 빨간 나뭇잎은 숨어 있다기보다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용히 내가 찾을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주었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으면 되었다. 내용과 상관없이 빨간 나뭇잎이 보이면 미소 지어졌다. 

  

  '찾았다. 너도 좀 숨을 줄 아는군. 숨기 좋은 곳이지.' 빨간 나뭇잎이 있는 곳에 나도 있다고 상상한다. 페이지 어딘가에 빨간 나뭇잎은 꼭 있다.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지속되었다. 


  괜찮아졌다. 


  괜찮길 바라는 마음으로 '빨간 나무'를 대학로에서 만난 선배에게 선물했다.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위와 같은 심정일 땐, 도서관에서 '빨간 나무'를 펼쳐 본다. 처음 보는 척하며 빨간 나뭇잎 찾기 놀이를 한다. '빨간 나무'를 빌려서 그냥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한다. 


  괜찮아진다. 

  '빨간 나무'는 우울할 때 숨기 좋은 그늘이 되어준다. 숨고 싶다는 건, 누가 찾아 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한 구석에 숨어 있다. 


  선배도 가끔 '빨간 나무'를 꺼내 볼까. 그렇게 괜찮아지기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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