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잎이 더 이상 달리지 않은 죽은 나무만 자꾸 보였다. 직립한 시커먼 그림자. 발로 툭 차면 힘없이 날아가 부서질 것 같은 둥치들. 속이 빈 조개껍데기처럼 생명이 다한 흔적들. 겉껍질은 벗겨지고 허옇고 말갛게 드러낸 속.
이전에는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 기억에 없던 것들의 기억이 생기고 쌓여간다. 죽은 나무들의 초대장이라도 받은 양. 그랬다. 한 번 의식하니 죽음은 도처에 깔려있었다. 죽은 나무가 뻗어낸 선들이 교차되어 어지러웠다.
내게 보이는 것들은 죽음이 아닌 뼈라고 정정했다.
때
때가 있다. 글쎄. 때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지. 따로 정해진 때가 어디 있어. 공부도 때가 있다. 글쎄,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면 좋은 거 아닌가. 시험 때가 되면, 소설이 왜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 요즘은 때라는 말 대신 타이밍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둥, 결혼도 타이밍이 맞아야 된다는 둥. 여기까지만 봐도 내 어투에서 '때'라는 단어에 취하는 입장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물론 부정도 긍정도 아닌 때도 있다.
인도 여행에서는 '때'라는 감각이 살아있었다. 때에 의지해 다녔다. 첫 해외 여행지였던 인도는 고등학교 때 생긴 꿈이었다. 세계지리 책에 바라나시. 갠지스 강을 보았을 때, 나도 저기서 목욕을 해보고 싶었다. 우습지. 목욕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갠지스강의 물이 성수라 하니 괜히 겉멋을 부렸던 것도 같다.
인도 여행의 꿈은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이룰 수 있었다. 인도여행을 약속했던 친구는 인도로 먼저 떠났고, 달을 뜻하는 ‘찬드라’라는 인도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학습지 교사로 힘들고 지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법정 스님의 '인도기행'을 읽으면서 곧 인도로 가겠구나 감지했다.
때가 되었구나. 스물일곱에 사십오 리터 배낭을 메고 인도로 떠났다.
인도에서는 배고프면 한 끼를 때우고, 둘러보고 싶은 곳에 가서 시간을 때우고, 때가 되면 숙소로 돌아왔다. 그것만 하면 되니, 그저 자유로웠다. 20대 젊었으니 팔팔했고, 겁도 별로 없었고, 무엇보다 천지 것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던 때였다.
여행지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도 때가 되면 헤어진다. 붙들 수 없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처음엔 그들의 이메일과 이름을 노트에 적기도 했다. 여행을 오래 한 친구와 나룻배를 함께 탄 적이 있었다. 말이 잘 통해 이름을 물었으나, 그녀는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저도 그랬어요. 집에 막상 돌아오면 연락 안 하게 돼요. 누가 누구였는지 기억도 희미해지고요." 그녀의 말이 좀 야멸차게 들렸으나 나도 여행을 지속할수록 이 순간 그와의 좋은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만 간직할 뿐 신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집착이 없어진 달까. 여행이 한결 더 자유로워진 느낌. 그렇지만, 못내 아쉬움이 드는 만남도 있었다. 나는 묻지 않았지만, 상대가 물어주면 기쁜 마음으로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곳이 아무리 좋아도 때가 되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 때를 알고 움직이는 게 여행의 전부다. 때와 계획은 다르다. 때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계획만 따르면 때를 놓칠 수 있다. 명소를 찾아 빡빡하게 다니기보다는 그저 거기에 있고 싶었다. 첫 여행치 고는 정말 느슨했다.
카주라호에서는 좀 더 있고 싶어서 사진 대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여행 전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것도 아닌데, 그랬다면 줄 없는 노트를 샀겠지. 줄 노트에 사원들의 덩어리. 전체적인 형태감만 그렸다. 못 그린 사원 덩어리들을 보는데 뿌듯함이 올라왔다.
사원에 소풍 나온 현지인 가족이 나에게 호의를 표했고 그림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1초의 망설임 없이 선뜻 보여줬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가 내 그림을 보고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표정.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미술학도라도 된다고 예상한 모양이다. 꼬맹이 수준도 안 되는 그림이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을 밖에.
그들은 멋쩍게 웃으며, 비스킷을 좀 먹겠냐고 물었다. 마침 입이 심심하던 차에 먹었던 비스킷은 참 맛있었다. 후에 한국인 여행자에게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더니, 다짜고짜 그러다 큰일 난다며 주의를 주었다. 인도인이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며. 큰일난다. 그렇게 당하는 여행객이 많다면서. 고개는 끄덕였지만, 수긍하지는 않았다. 그 가족은 친절하고, 순수했다. 내 그림을 보고 그렇게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데, 무얼 속일 수 있을까.
44일간의 인도 여행은 내게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체감하게 해 주었다. 때는 어느 한 지점의 몇 시 몇 분 정확한 시간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시간, 어떤 암시에 가깝다. 마음이 원하는 시간. 임의로 무작위로 조종할 수 없는 영역. 때는 시간과 공간이 내포된 움직임, 즉 이동이다. 이동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용이기도 하다. 이 때다 하고 때를 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때는 오고 가고 그 언저리의 시공에 그저 있을 뿐이다. 때가 오면 왔구나 하고 움직이면 그뿐. 그렇게 다가온 때도 결국은 붙잡을 수 없고 지나가니, 받아들이면 된다.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급하지 말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 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도 여행 후, 인도 친구 쉐리프는 내게 ‘라니’라는 인도 이름을 선물해 주었다. 라니는 힌디어로 ‘여왕’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물'이라는 뜻도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어디까지나 내가 드문드문 알아들은 영어다. 쉐리프는 그리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라니' 쉽게 부를 수 있는 단순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찬드라'에게 내게도 '라니'라는 인도 이름이 생겼음을 알려주었다. 꽤 오랫동안 우리는 서로를 '찬드라'와 '라니'로 부르며 각자의 인도 여행을 비스킷 먹듯 나눠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