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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Sep 02. 2024

너의 눈과 나의 산  


  급한덕이 집에 있었다면 아침부터 눈을 쓸었을 것이다. 용인에서 혼자 내려왔다. 내려오고 나서 이틀 연이어 눈이 왔다. 아침에 사붓사붓 내리는 눈은 고요한 시간 자체였다. 마당을 거닐었다. 오후가 되어 나가 보니, 눈은 없었다. 날이 포근해서 쌓일 일 없이 눈은 오면서 사라졌다. 오래 미뤄두었던 택배를 포장했다. 초록색 가방에 넣고 우체국으로 갔다. 순천에 오면, 제일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개운했다. 

                                         


산 

친구와 한 단어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사사프로젝트가 산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내가 먼저 끝을 꺼냈다. 밀린 한 글자 단어들이 숙제 같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담이 커졌고 짐스러웠다. 자꾸만 나를 억눌렀다. 내가 멈추자 하면, 친구도 그러자 하고 그간 서로가 쓴 글을 주고받는 그림을 그렸었는데, 친구는 혼자서 한 글자 쓰기를 계속 이어나가 100까지 채우겠다고 했다. 


  친구에게는 사사프로젝트가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재미있다고. 둘이 하던 사사프로젝트는 이제 친구의 장기 프로젝트로 바뀌었다. 


  사사프로젝트가 종료된 후, 편안하고 수월한 마음으로 산에 오른다. 사사프로젝트의 종료 전에는 산에 오르기 전, 늘 망설임이 있었다. 산에 가지 말고, 사사프로젝트 쓸까. 그런 마음으로 산에 가니, 산으로 가는 출발이 가뿐하지 않았다. 이런 마음으로 사사프로젝트를 써나간들 뭣하리. 


  집에서 나와 서른 발 정도 걸으면 뒷산의 초입이 시작된다. 산의 초입에는 아빠의 밭이 있다. 낡고 바랜 옷을 입고, 모자를 쓴 기괴해진 허수아비가 있다. 겨울에도 푸릇하고 싱싱한 보리 싹과 돔부 콩 싹이 있다. 칡동산은 꽤 오래 너울거렸다. 칡동산을 지나면 거대한 오동나무가 떡하니. 바라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나는 작고 사소해진다. 오동나무 앞에 서면 기분 상 청설모정도의 크기로 줄어드는 것 같다. 


  연보랏빛의 꽃이 만발하면 사방이 지릿지릿한 오줌 내가 난다. 그 시간이 떨어지고 가을이 시작되면 보랏빛 꽃향유와 꿀벌 길이 만들어진다. 그 길은 가을이 깊어갈 때까지 꽤 오래 있다. 산은 매일이 다르다. 직박구리 소리만 듣다가 올 때도 있고, 동고비, 딱새, 오목눈이, 박새, 딱따구리 등 다양한 새뿐 아니라 고라니, 청설모, 고양이까지 마주칠 때도 있다. 생명을 마주하면 묵직했던 것이 가벼워진다. 낙엽의 뒷면도 보게 되고, 나뭇잎이 떨어질 때 그리는 곡선과 소리에 우울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산길은 평지를 걸을 때와는 달리,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서 걸음 자체에 자동으로 몰두하게 된다. 

   

  산은 살린다. 바다는 받아주고. 적당히 살아났으니, 친구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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