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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위임은 '선물'이 아니라 '전쟁'이다

[권한 위임 4]

by 김홍재

많은 리더가 권한위임을 부하직원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나 선언'으로 착각합니다.


어느 날 아침, "자, 이제부터 당신을 믿고 맡깁니다"라며 결재권이라는 선물을 건네면, 그 순간부터 조직이 자율적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는 것이죠. 하지만 그 믿음은 이내 배신이나 실망으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굳게 믿고 맡겼는데도 결과물이 영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예기치 않은 사고가 터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죠. 결국 리더는 "이래서 내가 챙겨야 해"라며 권한 위임의 폭을 줄이거나 아예 회수해 버립니다. 권한위임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준비나 연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권한위임은 리더가 베푸는 '자비'가 아닙니다. 이것은 리더의 머릿속에 있는 모호한 '감'을 조직원들이 실행 가능한 '기준'으로 변환하는 치열한 번역 과정입니다.


리더가 "융통성 있게 처리해"라고 지시할 때, 영업팀은 '파격 할인'으로 알아듣고 재무팀은 '비용 절감'으로 알아듣습니다. 이 거대한 해석의 간극을 단 한 번의 선언으로 메울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리더의 의도와 현장의 해석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깨지면서, 서로의 주파수를 정교하게 맞춰가는 '동기화'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선행되어야만 진정한 위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 우아한 회의실의 거짓말


시스템 구축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장소'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직은 권한위임 규정(DOA)을 가장 조용하고 쾌적한 회의실에서 만듭니다. 기획팀 몇 명이 모여 타사의 멋진 규정집을 '벤치마킹'해오죠. 남의 회사 옷을 가져와 우리 회사 마크만 박음질하는, 이른바 '복사해서 붙여넣기'인 셈입니다.


문서는 깔끔하지만, 이 '우아한 문서'는 현장의 야전(Field)에 나가는 순간 단 3일도 버티지 못하고 찢겨 나갑니다.


책상 위 논리는 현장의 복잡성을 이기지 못합니다. 변수가 통제된 실험실 백신이 변종 바이러스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듯, 진짜 시스템은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회의실이 아니라, 피아식별이 어렵고 포탄이 빗발치는 비즈니스 현장의 한복판에서 잉태되어야 합니다.



2. 시뮬레이션 : '워 게임'을 시작해 봅니다.


문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면 책상이 아니라 '전쟁터'로 가야 합니다. 지난 수년간 조직을 괴롭힌 의사결정의 병목과 갈등, 사고의 순간들을 가감 없이 테이블 위에 올리십시오. 핵심 리더들을 소집해 가상의 '워 게임'을 시작해야 하죠. 점잖은 회의 대신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며 부딪히는 치열한 난상토론이 벌어져야 합니다.


"영업은 타이밍 싸움입니다. 본사 결재 기다리다 경쟁사에 다 뺏깁니다. 리스크 타령하다가 매출 빵꾸나면 재무팀이 메꿔줄 겁니까?"


"영업팀이 독단적으로 가격 흔들면, 생산 계획에 과부하가 걸리고, 긴급 자재 확보하느라 구매 비용만 폭등합니다. 매출 목표 채우자고 회사 수익성 망가뜨리는 결정, 우리가 언제까지 뒷감당해야 합니까?"


이런 날 선 질문들이 오가며 얼굴을 붉히는 조율의 과정은 소음이 아닙니다. 시스템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지극히 건강한 진통입니다. 리더와 설계자는 이 전쟁터의 치열함을 통해 현장의 맥락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책상 위의 평화로운 '권한위임 규정집'이 아닙니다. 포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아군끼리 엉키지 않고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게 만드는, 냉철하고 실전적인 '교전 수칙'이어야 합니다.



3. '낭비'가 아니라 '코어'를 단련하는 시간입니다


많은 경영진이 이 과정을 참지 못합니다. 실무자들이 싸우고 있으면 "일 안 하고 말싸움만 하냐"며 핀잔을 주고 개입하죠. 그 순간, 조직은 영원히 약골로 남습니다. 이 지루한 싸움의 시간은 낭비가 아닙니다. 조직의 '코어 근육'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사람도 화려한 근육보다 코어가 튼튼해야 부상을 당하지 않습니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이 좋을 때는 괜찮지만, 위기가 닥치고 돌발 변수가 터졌을 때 시스템이 없는 조직은 허리부터 무너집니다. 서로의 입장을 처절하게 공격하고 방어해 본 조직만이, 위기 상황에서 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업무를 쪼개고, 부딪히고, 각 구성원에서 ‘Authority Statement’ 한 장씩 만드는 데 1년, 2년이 걸린다고요? 기꺼이 투자하십시오. 그 시간은 조직이 맷집을 키우고, 위기라는 펀치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리더의 인내심이 시스템을 완성합니다


시스템은 기획팀의 작문 실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직 구성원들이 치열하게 부딪치며 만들어낸 '합의의 총량'입니다. 당신이 만약 제대로 된 권한위임을 원한다면, 부하직원들에게 '권한'이라는 선물을 주기 전에, 먼저 '링’을 만들어주십시오. 그 안에서 충분히 싸우고, 깨지고, 조율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그 지루한 전쟁의 시간을 견뎌낸 조직만이,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코어를 갖게 될 것입니다. 시스템은 책상이 아니라, 전쟁터의 흙먼지 속에서만 비로소 완성됩니다.


우리보다 앞서 100년 기업을 일군 글로벌 조직들이 왜 이 지루한 시스템 구축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권한위임 시스템은 한 번 만들고 끝나는 '기념비'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분석하고, 해부하고,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를 반복해야만 비로소 작동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이 치열한 유지보수와 갱신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위대한 기업이 시스템을 지키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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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플로우 기업교육 공동대표. 강의하고, 자문회의를 리드하고, 칼럼을 씁니다. callla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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