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서양철학사로 떠나는 생각의 여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행 코스는 고대철학, 중세철학, 근대철학, 현대철학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여행입니다. 이 여행의 이름이 ‘생각의 여행’인 이유가 있습니다. 문명을 만들기 시작한 고대부터 문명이 자연을 압도하고 있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둘러보는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둘러볼 풍경은 역사 속에 등장하는 사건이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냈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생각의 거리, 생각의 궁전, 생각의 박물관, 생각의 마을, 생각의 산과 강을 구경할 계획입니다. 이성에 부합하는 생각을 소중하게 여기며 강조했던 역사를 지닌 유럽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선 ‘자연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연철학자들은 자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연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각자 나름의 답을 제시했습니다. 당신은 자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가볍게 한번 생각해보고 여행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 여행에 동행할 동료 세 사람이 있습니다. 필로, 소피, 데오. 이 세 사람은 철학자들을 만난 후에 자연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게 될까요? 동료와 함께 철학자를 만나봅시다. 철학자의 생각을 들어보고 내 생각도 말해봅시다. 즐거운 여행이 되길 빕니다.
이곳은 튀르키예의 서남부 지역, 고대 이오니아 지역의 항구도시 밀레토스가 있던 곳입니다. 여기서 만날 철학자는 고대 7현인 중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입니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사람이 자연에 관한 탐구를 최초로 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일식을 예언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게, 올리브 풍작을 예상해 큰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할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저기 오는군요. 어서 오세요, 탈레스.
[탈레스 등장]
(탈레스) 자연에 대해 알고 싶다고요?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물이 모든 것의 근원, 즉 아르케(ἀρχή)입니다.
[탈레스 퇴장]
(필로) 이건 뭐죠? 이게 끝인가요? 당황스럽네요. 물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니. 저에겐 황당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데요? 이렇게 철학이 시작하는 건가요?
네, 그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2500년 전 사람의 생각이니까 당황스러운 게 당연합니다. 철학이 막 태동한 시기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인 우리에게 단번에 감격할 만한 통찰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을만한 주장을 하는 철학자를 만나려면 현대와 가까워야 합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며 자신의 사상을 개진하는 철학자는 탈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매력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고 넓게 듣기 위해서 탈레스부터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 철학자는 탈레스부터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를 이어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면 좋겠습니다. 탈레스의 황당한 주장의 이면에 숨어 있는 통찰을 찾으면서요.
탈레스의 주장엔 우리가 고민해볼 만한 것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많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글자들, 카메라, 스피커, 버튼 등 스파트폰을 구성하고 있는 부품들, 손가락과 손목, 팔을 비롯한 몸의 부분들, 책장의 책들, 벽지, 창문, 창문 밖 나무, 하늘, 구름. 우리는 많은 것들을 봅니다. 이 많은 것들을 철학자들은 ‘다자’(多者, the many)라고 부릅니다. ‘다자’를 ‘여럿’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런데 탈레스는 ‘다자’가 ‘일자(一者, the one)’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자’를 ‘하나’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러므로 탈레스는 ‘하나’의 물이 ‘여럿’인 세계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이 여럿의 세계로 변했거나 혹은 여럿의 세계가 하나의 물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입니다. 탈레스의 주장이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주장하게 된 이유를 추측해볼 수는 있을 듯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몸 안에 물을 머금고 있고 물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물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한없이 드넓은 바다를 보면서 땅이 물 위에 떠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다는 모든 존재의 근원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니까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다양한 세계가 어떤 하나의 물질로부터 출발했을 것으로 추측했다는 것입니다. ‘아르케’는 궁극적인 하나의 물질을 의미하고, 탈레스는 ‘아르케’가 다른 게 아니라 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탈레스의 생각이 우리에게 던지는 또 다른 고민은, 탈레스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을 존재의 바깥으로 추방했다는 점입니다. 물이 궁극적인 물질 ‘아르케’이거나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계가 사실 물로 된 것이라면, 세계에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신을 끌어드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바다를 만든 바다의 신, 하늘을 만든 하늘의 신, 대지를 만든 대지의 신을 들먹이지 않아도 모든 존재하는 것과 그 모든 존재의 근원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탈레스는 신 없이 세상을 설명하기를 시도한 첫 번째 사람인 것입니다.
(소피) 신화의 설명을 벗어났기 때문에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물론, 실망스럽게도 탈레스는 때때로 세상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의 역사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 탈레스의 아이디어는 지금 그에게서 들은 물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그의 말입니다. 철학은 ‘물이 모든 것은 근원이다’는 말에서 시작했고 모든 철학자는 이 말을 가슴 깊이 품고 있습니다. 비록 탈레스의 위대한 업적과 달리 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철학자는 계속 등장하지만 말이죠. 그래도 탈레스는 이전 시대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각을 시작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이 철학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하고, 정교해지는지 앞으로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탈레스를 만났으니 여러분이 철학자 탈레스처럼 ‘철학하기’를 해보기 위해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대답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분명 우리가 사는 이 자연이 다자, 다양, 여럿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럴 것 같은데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연의 근원, 다자의 근원이 되는 일자, 여럿의 출발점이 되는 하나는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아르케’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신은 꼭 필요할까요? 아니면, 신 없이도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잠깐 시간을 드릴 테니 생각해보세요. 생각하면서 탈레스의 생각에 반대하는 다음 철학자를 만나보겠습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