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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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은 어리둥절했다. 오다가다 마주치면 인사나 나누던 연하가 갑자기 무슨 일로 불러낸 걸까? 그러다 이내 반성했다. 그래도 5년 동안 한 집에 산 것과 다름없는데, 오히려 그동안 교류가 너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집을 떠나네, 호정은 주택을 파네 하는 지금, 아래층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연하와의 연대로 집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누나!”
“연하야!”
집에서 1km쯤 떨어진 근린공원. 그네 하나, 벤치 두 개, 그리고 사방을 감싸는 커다란 나무들이 가로등 불빛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늦은 밤, 연하가 다정을 이리도 조그마한 공간에 불러낸 건 호정의 조언 때문이었다. ‘사람 바글바글 카페 술집 그런 데 말고 조용히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오케이? 다정 언니 완전 내향인인 거 알지?’
“이거 드세요.” 연하가 편의점 다섯 군데를 돌아 겨우 구한 맥콜 캔을 내밀며 말했다.
“와, 너도 이거 마셔?”
“네, 제 최애.” 연하는 탄산을 싫어했다.
“이거 좋아하는 사람 처음 봐. 신기하다.” 다정이 옅게 웃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민들레처럼 청순한 그 미소에 연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연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곤 입을 열었다.
“누나, 나와줘서 고마워요. 사실 제가… 고민이 있어요.”
“고민?”
“네, 뭐랄까, 요즘 삶의 길? 방향성? 같은 걸 잃어버린 것 같아서요.”
“방향성?”
연하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런 본인의 말을 반복하는 다정을 보며 ‘이게 맞나’하는 의심이 들었다.
‘다정 언니는 고민 있다고 하면 바로 감정이입 해버려. 마음이 약해진다 이거야.’ 호정의 조언을 따라 여기까지 왔지만, 사실 연하는 타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고민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본인에겐 이미 ‘부모님’이라는 삶의 길잡이가 있었고, 그들을 따르기만 하면 대부분이 해결됐다. 어쩌다 어려움이 생겨도 해답은 단순했다. 성적이 고민이라면, 공부를 하면 됐다. 살을 빼고 싶다면, 운동을 하면 됐다. 이 모든 걸 해도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타협하면 됐다. 그런 연하에게 좋아하는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건 부자연스럽고 낯선 행위였다.
그런데….
“힘들었겠다.” 다정의 부드러운 손이 연하의 굳어있는 어깨 위로 올라왔다. 토닥토닥. 연하의 심장이 팔닥팔닥 뛰었다. 이번엔 심호흡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들어줄게. 답답한 거 다 말해 봐.” 다정의 호의적인 태도에 연하는 호정의 조언을 떠올렸다.
‘일상언어가 아니라 어디 서점 막 구석에 박혀있는 인기 없는 소설스러운 그런 문장을 써야 돼. 못 알아듣겠어? 그럼 그냥 말도 안 되는 비유들을 써! 팍팍!‘
“음, 그러니까… 전….” 연하의 말문이 막혔다. 2년 동안 공부한 행정학개론에 비유적인 표현은 없었다. 다 쓴 치약을 짜듯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입 밖으로 내뱉을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45도로 숙이자 길 건너 공사 중인 도로가 보였다.
“도로!“ 연하가 앉은 채로 팔짝 뛰며 거의 소리 지르듯 말했다. 비유할 대상을 찾아 기뻐하던 연하가 이내 본인 행동의 부자연스러움을 인지하곤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그러니까…” 다행히 다정은 별말 없이 연하가 말하길 기다려줬다.
“그러니까… 꼭 닦여진 도로가 아니어도 괜찮았던 거 아닐까… 생각해요… 비포장 도로의 울퉁불퉁함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 길이 제 길이라면.“ ‘제길’ 연하는 탄식했다. 이렇게 똥 같은 말을 내뱉을 거면 다정을 왜 불러냈나 자괴감이 들었다. 책꽂이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에세이에서 몇 문장 외워올 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
침묵이 이어졌다. 연하는 이 순간을 피할 수만 있다면 군대라도 다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네.”
“네?”
“불편해도 어쩌겠어. 내 길 따라가야지.”
“아?“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 걸.”
“마, 맞아요!” 통했나? 연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다정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정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다정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라는 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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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정은 내심 충격이었다. 연하를 가끔 마주칠 때면 다정은 ‘나사’를 떠올렸다. 사회에 의해 이리저리 필요한 곳에 꽂힐 나사. 주체적인 영혼으로는 설 수 없는, 아니 설 생각도 없는 그저 부품에 지나지 않는 나사. 다정은 같은 나사라면 차라리 ‘고장 난 나사’를 고를 사람이었기에, 나사 중에서도 가장 튼튼한 나사일 것만 같은 연하에게 그동안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알고 있는 정보는 고작 직업 정도였다. 다정은 그 제한된 요소만으로 한 사람을 재단하려 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빨개졌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치욕스럽기까지 했다. 이젠 연하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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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야, 넌 뭘 좋아해?”
‘누나요’라고 말하려다 간신히 참은 연하는 또 머리를 굴렸다. “음… 뭐랄까… 이런 시간이요.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간?”
“너 생각보다 생각이 많구나?”
“그렇죠.” 연하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지난 5년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 이 5분 동안 다정과 확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호정의 말처럼 다정과 사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가끔은 제 생각에 제가 잠식되기도 해요. 계속해서 길을 잃는 거죠.” 평소에는 하지도 않을 말들이 뻔뻔스럽게 연하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맞아, 맞아, 그럴 때 있어.”
“누나랑 얘기하고 나니까 방향성이 좀 잡히는 것 같아요.“ ‘길, 도로, 방향성.’ 연하의 가용어휘가 끝나간다.
“그래? 고맙다. 가끔씩 답답할 때 말해. 또 얘기 들어줄게.”
‘또? 맞다, 애프터!‘ 연하는 다음에도 이런 천국 같은 시간을 가지려면 뭔가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호정 누나 도와줘요!’ 연하는 힌트가 될만한 호정의 조언을 떠올리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자, 가장 중요한 거!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막 사라져 버리고 싶은 단어를 써야 돼. 최대한 오글거리게!’
연하가 주먹을 쥔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그럼, 누나가 저의 ‘이정표’가 되어 줄래요?”
연하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음성을 토해놓고 나니 진짜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연하에게 이런 유의 문장은 차라리 외계인의 언어였다. 연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다정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렇게 연하가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던 찰나, 다정이 답했다.
“…그래, 좋아”
싫지 않은 듯,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였다.
계속.
안녕하세요, 유이음입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마지막화인 24화까지 매일매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5화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라이킷과 댓글, 작가 소개 옆 구독 및 알림 버튼>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