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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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들 코빼기도 안보인다. 주인님이 아이들에게 폭탄선언을 한 그날부터 쭉 덩그러니 혼자 방치되어 있다. 삼겹살집을 개업했을 때도, 다정이 호정이가 고3일 때도, 아무리 바빠도 내 위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TV도 보고 떡볶이도 먹고 왁자지껄 그랬으면서. 명색이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가구인데 아무도 날 안 챙겨주니 조금 서운하다.
그래도 그나마 다정이가 날 가끔씩 찾아준다. 음, 그런데 나도 좀 이상한 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된다. 다정이는 이 집을 포기한 걸까? 포기한 게 아니라면 밤낮으로 방에 틀어박혀 만화만 그려야 할 텐데 말이다.
어제저녁, 주인님들은 식당에서 한창 일하고, 호정이는 모의고사 스터디에 가 있을 시간. 아래층 고연하씨가 우리 집에 왔다. 이름만 들어봤지 실물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그리고 잘생겨서 놀랐다. 여자 주인님이 자주 보던 드라마에 나왔던 그 눈 되게 똘망하고 엄청 동안인 배우, 그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겼던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다정인 누구에게나 다정하다. 하지만 어제의 다정은 결이 달랐다. 사람 아닌 나도 감지할 만큼 간지러운 기류가 흘렀다. 둘이 내 위에 앉아 맥콜 캔으로 건배를 하곤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몇 번 주고받더니, 토요일에는 영화관에서 보자는 약속을 굳이 새끼손가락까지 걸어가면서 했다. 뭐, 딱 거기까지만 해줘서 고마웠다. 더 이상은 아무리 한낱 사물인 나라도 민망하고 부끄러웠을 것 같다.
소파로 살다 보면 이렇게 종종 다른 식구들은 모르는 개인의 비밀을 알게 될 때가 있다. 특히 첫째 다정이가 내게 많이 들킨다. 그래서 난 다정이가 애틋하다.
다정인 늘 외롭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내 위에 앉아 멍하니 까만 밖을 보는 일이 많다. 자기 방 놔두고 굳이 거실까지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가족들이 잠깐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방 밖으로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치길, 그 김에 쓸쓸함을 들키고 이야기 나누길. 늘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용기 없는 새벽 쇼는 대부분 흥행하지 못했다. 날이 밝으면 다정은 무대를 외부로 옮겨 마음의 허기짐을 채우는 것 같았다. 다정이 주변엔 늘 남자가 많았으므로. 이런 패턴은 다정의 인생이 흔들릴 때면 더 자주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요즘이 다정의 삶에 가장 커다란 지진이 찾아온 시기인 듯하다. 영문 모를 소용돌이가 휩쓰는 마음을 잠재워줄 누군가가 있어야만 다정은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다. 내가 봐온 다정은 그렇다.
고연하씨에게 시간을 뺏기지만, 온기는 얻는 상황,
다정이 집을 지키기에 좋은 조건인 걸까, 아닌 걸까?
무생물인 나로선 참 알 수가 없다.
계속.
안녕하세요, 유이음입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마지막화 인 24화까지 매일매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6화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라이킷과 댓글, 작가 소개 옆 구독 및 알 림 버튼>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