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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17. 2024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오늘도 나는 감탄寫] 18

국민학교 때는 공부 하나 하지 않고 줄곧 운동만 했다. 그냥 한 운동이 아니라 학교 대표 운동선수. 그러다 큰 수술 이후 중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런 생각이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안개처럼 스물 거리던 오늘 아침처럼 어둑했던 어느 날. 중1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을 거다. 


칠판에 써지는 글씨를 그렇게 한참을 쳐다본 적도 거의 처음이었다. 오전에는 졸다가 점심 먹고 오후에 다른 아이들이 수업을 들을 때 내내 운동장에서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집에 와서 엄마한테 안경을 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오늘 같은 날이면 맨 뒤에 앉았기 때문에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질 않는다'라고.


길게 주절거린 내용은 안경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었던 것 같다. 운동선수로만 살 다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폼을 잡으려고 그렇게 안경을 쓰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나 스스로 이제 쫌 변했다는 것을 나와 주변, 특히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을 거다. 그렇게 쓴 안경이 벌써 40년째다. 내 몸 다음으로 나하고 오래 산 게 안경인 셈이다.


나의 시력은 지금도 양쪽이 꽤나 불균형이다. 안경을 쓰지 않고 왼쪽은 0.8에 가깝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시력검사표의 0.1 아래가 뭉쳐 보인다. 군에 있을 때 옆 전우 과격이 두발이나 더 쏴준 게 나였다. 거기에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 노안이 시작되었다. 가까운 책 속 글씨는 잘 안 보이지만, 운전할 때 멀리 이정표는 꽤나 선명했다. 


멀리 보는 시력이 렌즈 윗부분의 3분의 2, 모니터나 책을 보는 시력이 렌즈 아랫부분의 3분의 1에 맞춰진 다초점 렌즈를 맞추어 지금껏 쓰고 있다. 처음 다초점 렌즈를 썼을 때는 신세계였지 싶다. 그때는 책보다는 업무적으로 보는 모니터의 해상도가 훨씬 더 좋아져 편안했다. 


그러다 차츰 책을 보는 데 조금 더 편안해지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 들어 모니터를 볼 때 보다 더 많이 숙인 채 장시간, 오랜 기간 책을 읽다 보니 시력은 의외로 여러 가지 근육의 상태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안경을 사용했다 안 했다 하면서 안구를 둘러싼 근육들의 피로도도 커졌다. 


게다가 그 근육들은 목과 어깨를 연결하는 경추근과 승모근의 긴장을 유발하고, 그렇게 굳은 근육들은 척추 기립근으로 이어져 딱딱하게 굳는 연속 동작을 유발한다. 그러다 결국은 엉덩이 근육마저 양쪽의 균형을 잃고 기우뚱해지는 자세를 갖는 느낌을 받았다. 


1년째 재활 중인 요통이 불균형이 깨진 자세에서 왔다는 주치의의 진단이 아마 책 읽는 자세에서도 기인한 거라는 것은 나만 느끼는 중요한 원인이지 싶다. 작은 글씨의 두꺼운 책을 2시간 정도 연속으로 읽다 보면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한 개의 통나무처럼 굳어져 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책 속에서 내 삶의 균형점을 좇느라 육체적인 불균형을 방치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거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이왕이면 내 삶도 육체도 균형 언저리에서 머물러 있는 게 길게 보면 훨씬 더 많이 읽고, 쓰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긴 분명하다. 


작년 한 해 동안 약 6만 2천 권의 신간이 종이 책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하루 167권꼴로 새로운 책이 나오고 있는 거다. 이전보다는 다소 줄었다고는 해도 내가 책을 쓰기 어려울 뿐이지,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대단한 작가들의 영혼이 담긴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거다. 


내용 따라 분량 따라 다르지만 난 보통 2주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보통 새벽에 읽는 책, 사무실에서 가끔 보는 책, 침대 머리맡에 늘 놓여 있는 책 등 3권을 동시에 읽는다. 새벽에 읽는 책이 속도가 가장 빠르지만 그렇게 3권이 시작과 끝이 어긋나면서 맞물려 읽혀진다. 


여전히 이 세상 마지막날까지도 좋은 책을 읽다 새벽에 눈을 감고 싶을 따름이다. 읽은 책을 내 삶의 균형점을 찾는 훌륭한 거름으로 쓰다가. 이전에는 책꽂이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필사를 했다. 하지만 열심히 기록해 둔 영어 단어를 다시 꺼내 암기해 보는 게 쉽지 않듯, 늘 일상에 밀려나기 일쑤였다. 


1년여 전부터는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남는 느낌이나 문장을 바로 구글 앱 KEEP에 옮겨 기록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 옆에 노트북을 항상 켜놓는 이유다. 구글러들이 정말 와닿는 네이밍을 했다. '내 문장, 내 생각 KEEP해줘'. 


KEEP은 책이 없을 때 읽었던 문장을 언제, 어디서나 다시 읽고, 읽고, 읽을 수 있는 접근성이 단연 최고다. 물론 그러는 동안 시력에서 시작되어 경추, 어깨, 척추, 엉덩이 근육까지 이어지는 근육을 일부러 더 챙겨야 한다는 것을 몸이 먼저 말하는 것을 자주 느끼면서. 


몇 달 전. 새로운 독서대를 발견하고 잠들기 전에 환호성을 질렀다. 냉큼 설레는 마음으로 한참을 주저했던 새벽 배송을 오랜만에 눌렀다. 택배를 기다리는 설렘을 참 오랜만에 간직하고 새벽에 일어났다. 원래 그렇다. 개인의 역사는 이전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나에게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견고하고 투명하고 심플하게 나의 눈높이에 맞춰 자유롭게 높낮이와 회전이 가능한 독서대. 이것을 기획하고 만들어 낸 분은 정말 책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임에 분명하다. 기존의 뭉특하고 묵직한 나무나 철제의 독서대보다 휴대성도 좋은 건 그저 덤일 뿐이다. 


요통 때문에 서서 읽고, 쓴 지 일 년이 넘어간다. 허리를 세웠지만 읽어야 했던 경추, 승모근, 척추 기립근은 여전히 앞으로 쏟아져 내렸었다. 그런데 이 독서대를 사용하고 1월부터는 서서 읽을 때나 앉아서 읽을 때나 승모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듯 책 읽기를 즐기고 있다.  


다만, 안경을 아예 벗고 책을 읽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왜냐하면 다초점 렌즈의 각도가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독서대는 고개는 물론 눈동자도 거의 정면을 바라보듯 하면서 읽을 수 있어서 다초점 렌즈의 3분의 2가 되는 윗부분으로는 글씨가 뭉쳐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경을 낀 채 책을 읽으려면 턱을 꽤나 들어 렌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랫부분으로 통해 글씨글 쳐다봐야 한다. 경추와 승모근이 뒤로 젖혀지는 꼴이니 자세도 어색하고 목도 불편하다. 40년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으면서 안압을 높여 시력을 계속 떨어뜨렸던 자세를 이제야 탈출할 수 있게 된 듯하다. 


게다가 책 읽는 속도, KEEP 하는 속도가 1.5배는 빨라졌다. 새로운 독서대를 편안하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어쩌면 인생은 책 읽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막 나온 책은 뻣뻣하다. 몇 장을 넘겨 강제로 고정을 해둬도 자꾸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려 버둥 거린다. 


속도를 좀 내어 읽기 시작하면서 그 책은 서서히 나와 균형을 맞춰간다. 억지로 부여잡고 넘어가지 못하게 한 그제야 위로해 주듯이. 그러다 어순간 지나온 페이지와 남은 페이지가 균형을 스스로 맞추는 지점이 나타난다. 


그 지점부터는 손을 대지 않고도 황홀해질 수 있다. 심리적으로도 차분해진다. 나의 손가락 끝도, 승모근도, 척추도, 엉덩이 근육도 단단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균형 덕분에 나는 모르는 작가와 급속도로 친구가 되고, 제자가 되고, 스승이 되는 순간의 황홀경에 빠져 든다. 편안하다. 자체가 평화롭다. 


게다가 내가 의심하고 겁먹고 심지어는 싫어서 도전하지 않던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보인다. 길로 과감하게 뛰어들 체력과 자신감과 열정이 용솟음친다. 분명 이내 얼마 남지 않은 장이 자꾸 급하게 덮혀지고 사라지려 바둥거리는 걸 경험하게 되지만. 개 남지 않은 늦가을 이파리처럼 파라락거리지만. 


오히려 장 덕분에 책에서 만난 친구와 제자, 스승을 나로 만들어야 새로운 지름길에 나만의 이름을 붙이고 천천히, 느긋하게 붙여 KEEP 할 다. 책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싶어 읽는다고 했다. 혼자 힘들지 않고, 혼자 외롭지 않고, 혼자 잘나지 않고, 혼자 넘치지 않다는 것을. 


나도 세상도 시작할 때는 자꾸 원래대로 돌아가려 한다. 불확실성에 대한 의심이다. 하지만 안다. 그 시간을 잘 이겨내니 어느 순간 시작과 남은 게 균형을 맞춰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세상으로 통하는 문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강박하지 않으면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내 눈으로, 경추로, 승모근으로, 척추로, 엉덩이로, 내 손가락으로 읽고 쓸 수 있는 지금이 너무나도 가장 좋을 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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