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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10. 2024

십대들과 e-mail을 주고받는 이유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17

학교는 여전히 정답을 요구하는 공간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정답이란 질문에 맞는 답이 '오직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는 게 전제 조건이다. '오직 하나'를 찾아내는 능력은 공들인 만큼 나오는 거라, 는 통념이 각자의 신념이 되어 우리 각자의 인생을 꽤나 오랫동안 지배하는 '학력, 실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되지 싶다. 이 이야기는 거꾸로 하면 안(못)했으니까 그 결과지,라는 사회적 함의를 우리 스스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가치로 이어진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기능상 그런 학교가 안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성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이 이곳이다. 몇십 년 전보다는 분명하게. 그때가 지금이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아이들은 다 다르다. 매일 아침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다르고, 밤늦게까지 앉아 있는 이유도 다르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다르고, 가고자 하는 목적지도 다르다. 떨어져 표면적으로만 보면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 더 오래,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정말 다 다르다. 


분명 지금도 예전처럼 행정적 등급으로 갈라지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그곳에 비해) 역설적으로 종이 위에 펼쳐진 제한된 문제 외에는 '오직 하나'의 정답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일찍 경험하게 되는 첫 경연장의 기능이 활발하게 제안되고 있다. 특등급이 모자랄 정도로 자기 것을 잘 챙기고, 잘 해내지만 언제나 불안정한 아이들에게도, 낮은 등급에 관계없이 자기가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을 또렷하게 자기고 있어 언제나 오늘을 행복하게 채우는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그 사이의 수많은 아이들도에게도.  



'지킬 것 다 지키고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듯 살아가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빌런일 수 있다'



첫날, 첫 시간에 나와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어디에선가 흘러들어 내 안에 들어 찬 이 흔한 문장 속에는 아등바등 정답 하나만 찾느라 자기를 모르는 아이들, 정답도 찾고 해답의 힌트도 얻는 언제나 유쾌한 아이들, 자기만의 정답을 찾아 오늘을 버리고 방황하는 아이들, 정답 찾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아이들, 해답만 찾아 구름 위를 거니는 아이들. 자기만의 답을 이미 찾은 듯한 아이들. 짧은 기간임에도 이미 다양한 삶의 자세를 지닌 아이들이 때로는 경외롭기까지 하다. 내가 지금, 10대를 다시 산다면 '어떤 아이'의 모습을 살아낼지 슬쩍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또 다른 걱정이 있다. 그것은 지금 아이들은 서로 '만나지' 않고 산다는 거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학교에서부터. 친구는 많다. 하지만 깊이 있게 만나는 친구는 아주 오래전 우리 때보다 훨씬 적다. 오랫동안 옆에서 보니 해야 할 것이 많아 시간이 부족한 이유만이 아니다. 그냥 만나지 않는다. 필요성을 못 느낀다. 필요성은 결핍에서 나온다. 결핍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또는 자신의 주변)에 의해 만들어진 틀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그 영역에서만 '현실적인' 의미를 찾는다. 그런 맥락에서 진로가 직업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친구라고 하는 사이에도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못하는 건 더 오래다.


나는 아이들에게 카톡이나 문자를 (되도록) 하지 않도록 한다. 위의 말을 해주면서 첫날, 메일을 칠판 가득 크게 써 준다. 카톡, 문자는 보내도 읽지 않을 수가 있다고 강조한다. 급할수록 메일을 보내라고 한다. 그리고 첫날 첫 시간의 많은 부분을 메일 보내는 방법을 알려 준다. 태생적으로 최첨단이었던 아이들 중 의외로 메일을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 심지어는 첫날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하는 첫 과제가 메일 계정하나 만들기인 아이들도 의외로 많다.  


톡이나 문자보다 메일은 글이 된다. 올라오는 생각대로 보내는 게 아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시작하는 말과 끝맺는 말을 좀 더 신경 써야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메일을 주고받는 게 좋은 점은 이것이다. 정답을 묻고, 질문을 하다 보면 (소위 말하는 진로진학에 관련한) 자기 고민을 넌지시 묻게 된다. 그렇게 수없이 온라인에서 글로 생각을, 다짐을, 감사함을 주고받고 나면 교실에서는 나와 서로 눈인사만 나눠도 서로 믿음이 생긴다. 서로 더 챙겨주고 싶어 진다. 아이들에게 친구한테 톡 하지 말고, 문자 하지 말고, 메일을 써보라고 하는 이유다. 그렇게 짧은 문장이 진심이 되고 마음이 된다. 깊은 대화를 하지 않고, 영혼을 나누는 친구가 적은 아이들에게 피어오르는. 


현실적으로 그 아이들 속에서 단 하나의 정답도 찾아줘야 하고, 시험지 밖의 세상에 대한 해답도 찾아볼 수 있도록 조언을 해야 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아이들에게서는 메일이 오고 있다. 정답을 묻고, 해답을 구하는 아이들이 잠 못 들고, 잠을 미루고. 조언은 잘 되기를 바라면서 하는 잔소리다. 그래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그렇게 힘들여 마음먹고 조언을 하다 보면, 미세하게 마음이 달라지는 걸 스스로 느끼게 된다. 이유는 상대적 등급 때문이다. 


(지금의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언제나 등급으로 갈라져 자랐다. 파릇하게 피어오르는 새싹이었을 때, 오직 하나의 기준만으로 15등급, 12등급으로 나뉘었다. 지금 아이들은 9등급으로 한참을 살아오고 있고 몇 년 뒤부터는 다섯 개의 등급으로 줄일 거라지만 여전히 나뉠 예정이란다. 10대 때부터 '자기'삶은 '다른'삶과의 비교치에서 결정되는 상대적 삶이라는 것을 당사자 스스로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출발선이 될 수 있는 확률은 여전히 그대로다.   


상대적 등급은 동일한 시기에 함께 했던 그 집단에서의 상대적 자기 위치이다. 그것도 성적으로만. 게다가 학교라는 특수한 조직에서만. 그런데 마치 그 이후의 다른 (모든) 시기의 자신의 인생에도 일정 기간 동안(주로 낮은 등급보다는 높은 등급을 받는데 익숙했던 아이들이 그런 어른으로 살고 싶어 하는 기간이 더욱 길다) 적용하면서 살아내려는 경향이 있다. 9등급은 스스로가 인생도 9등급쯤으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1등급은 언제나 1등급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서류상 낮은 등급의 아이도 실제는 1등급이 아니라 특상급도 모자란 풍부한 감성을 갖고 어린 나이 답지 않게 공감을 하면서 깊이 있게 주변을 돌보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의 마음결을 가진 아이들 말이다. 다만, 마치 내가 지금 이 경력, 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을 전혀 연주하지 못하고 발레를 하지 못하듯 읽고 쓰는 데에 관심이 없거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누적되어 왔을 뿐이다. 물론 자기 것은 너무나도 잘 챙기고, 주어진 자원을 아주 잘 활용하는 이해타산에 밝은, 현명한 아이들도 많다. 


사회 제도나 구조적 강점을 최대한 활용을 잘한다. 현실적으로는 교사 활용 설명서를 달달 외우고 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아이들이다. 그 결과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거나 근사치에 갈 확률이 높다. 다만, 너무 일찍 혼자 사는 삶의 자세에 익숙해져 외로워한다. 그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놓친다. (오래전 한 토론장에서 '아니, 지금 외로울 시간이 어딨어요'하면서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차던 어느 학부고 표정이 불쑥 올라온다). 


시간이 없어서라고 하지만 불안이 커서 그렇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전자의 아이들보다 훨씬 덜 건강하다. (나이를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싶지만 단순히 나를 만나던 그때의 시점에서만 보면) 그냥 그대로 의사가 되면, 가르치는 이가 되면, 누군가의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면 자신은 물론 서로가 어려움이 많을 것 같은 뛰어난 아이들 말이다. '똑똑하니까 스스로 알아서' 잘할 거야,라는 주변의 무언의 압박 속에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그것도 언제나 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어제처럼 오늘도 덜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큰 거다.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고, 10대를 가득 채운 그 공간이 자신의 청소년기의 전부였던 (우리) 시대에는 전자는 물론 후자의 아이들도 문제가 없었다. 인권이 없었고, 삶의 질을 논할 수준이 아니었고, 그야말로 '오직 하나'의 정답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던 아주 심플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만 보면 지금의 아이들 앞에 설 때마다 내가 이미 10대를 지나온 건 (너무 미안하게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밖에 없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학교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아이들을 위한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월요일 오전 10시'에 10대들이 학교에 가 앉아 있는 비율이 40%가 채 되지 않았던 시카고 출신의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한국을 부러워했던 가장 큰 이유다. 그런 면에서만 보면 아이들은 정말 눈물 날 정도로 착하다. 마주 앉아 조금만 마음으로 안아주면 단박에 내 편이 되어 준다. 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 정도로 학교를 (잘) 나올 수 있을까, 하고 기가 찬 아이들마저도. 


표면적으로는 서로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의사결정에서 항상 밀리는(그리고 밀리는 것을 스스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방점을 두고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마음이 괜히 불편하고, 괴롭기까지 할 때가 꽤나 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게 그래서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가르침이 끝나고 쉴 때도 그 눈빛, 목소리, 처진 어깨가 자꾸 따라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도 세상은 뒤섞인다. 지금의 우리처럼 전자의 아이들과 후자의 아이들은 언젠가 만난다. 직장 선후배로, 얼마 전 이사 온 윗집, 아랫집 이웃으로, 출퇴근길에 스치는 익숙한 타인으로, 다들 모여드는 유명한 여가 공간에서. 앞의 아이들도 뒤의 아이들도 좀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더 많은 기회비용이 들어가기 전에) 서로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 찾으려다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그 옆에서 안내하고 도와주는 게 (전혀 완벽하지 못한) 가르치는 이의 진짜 역할이지 않을까. 잘 가르친다는 건 이 세상 모든 '선생'이 해야 할 몫이다. 먼저 태어나 먼저 실패해 본, 그리고 실패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는 어른들.  

 

아이들이 항상 존재하는 학교는 신기하리만큼 (거의) 언제나 공사 중이다. 낡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다 아이들을 위한 거다. 합리적이고 쾌적한 공간에서 효율성과 형평성, 개성과 다양성이 더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사회적 함의를 실천하는 거다. 그 덕에 요즘 공사하는 인부들을 자세히 볼 기회가 많다. 그들의 합은 거의 예술에 가깝다. 느릿하지만 어느 순간 완성이 되어 있고, 흐릿하지만 자기 역할이 분명하고, 어수선한 듯 하지만 인과관계가 명확한. 


그들의 장면을 한참을 쳐다보다 느끼게 된다. 우리가 각자의 목표를 설정하고 체력을 키워 마음에 깊고 안정적인 지혜의 호수를 만들려고 하는 것도 좀 더 어른스럽게 살아내려는 자기 공사의 과정일 거라고. 다만, 공사 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실패 중이라고. 그래서 더욱 완벽할 수 없다고. 하지만 자기 공사 덕분에 실패하고, 완벽하지 않다는 나를 돌아볼 체력과 여력은 조금 생겨나지 싶다. 그러면서 완벽한 인간이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더 잘 알아가게 되지 싶다. 완벽한 인간이란 극도록 취약하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제 그 지혜로 전자의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기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후자의 아이들이 훌륭한 자리보다 멋진 인격과 교양을 챙겨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계속 알려주고 싶다. 세상의 모든 아들 딸들에게 톡 대신, 문자 대신 메일로. 이모티콘 뒤로 숨지 않고. 그 메일 속에서 나의 10대를 먼저 고백하고, 그들의 10대를 나서서 격려해 주고 싶다. 메일 하나에도 하루 종일 설렘이 가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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