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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Feb 25. 2024

비는 원래 소리가 없다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15

지금, 이 새벽에 비가 내린다. 암막 커튼이 처져 있어 일부러 내다보지 않으면 온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불빛은 나보다 키 큰 스탠드 등과 모니터 화면빛뿐이다. 배에 햇빛 가리개 봉지 씌우듯 한지로 배만 한 등 주위를 가려나 그 빛마저 온전히 새어 나오지는 못한다. 오히려 모니터 화면빛이 밤세상의 직사각형 낙관처럼 번쩍인다.


이번주 나하늘은 내내 먼지 가득 묻어 거묵해진 눈처럼 어둑하게 흐렸다. 월요일에 내린 비는 비일까 싶었다. 차에서 내려 출입문까지 우산을 펼치지 않고 달렸다. 그러다 화요일은 아침부터 우산을 펼쳐 들어야 했고, 수요일 아침에는 출근길에 차창으로 얼어버린 비가 굵은소금처럼 흩뿌렸다. 타닥, 팅, 핑, 토토독, 토독 소리를 내면서.


목요일 새벽에는 책을 읽는 내내 밤바다처럼 어둑한 바깥이 조용했다. 비는 분명 내리지 않는 거구나 했다. 1층 두꺼운 문이 열리는 순간, 온 세상이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멈춘 채 흔적만 가득 남겼다. 눈은 비와 다르게 언제나 소리를 내지 않는다. 달려 나가는 차 앞유리에 가라앉았던 눈이 가루가 되어 소리 없이 다시 피어올라 부딪히다 날다를 반복한다. 허공 속에서.  


쓸쓸한 허공을 새하얀 눈가루가 차 안을 가득 채운 비트에 맞춰 춤을 추듯하는 장면에 위로를 받으며 달려간 곳. 풍경도, 물건도 심지어는 공기 마저 딱 붙어 있는 듯한 익숙한 출근길이었다. 하지만 목요일은 올해 가득 나와 함께 생활하게 될 새로운 스물여덟 명의 아이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어떤 아이들일까 하는 설렘이 여전하지만, 우연히 나를 만난 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하는 긴장감이 더 크다. 그러니 난생 처음 고3을 해보는 아이들은 오죽할까 싶다.


중간중간에 고3 얼른 졸업장만이라도 받고 싶다 하는 몸부림인 몇몇의 꾸러기들이 아니었으면 숨이 막힐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긴장된 아이들. 이럴 때는 얼른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읽으며 쓰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면 그 긴장이 슬쩍 비켜난다. 연락처, 친구 관계, 대학 진학 계획, 관심 분야, 방과 후 생활 모습 소개. 학기 초 이런 것들을 쓰는 건 고3 아이들은 익숙해한다. 편안해한다. 그러면서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 느릿하게 충분히 시간을 주면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잘 쓴다.


그러는 동안 몇가지를 전달하면서 내가 먼저 나를 소개한다. 지혜로운 이야기꾼이 되고 싶은 '지담'이라고. 몸나이 오십셋, 선생나이 스물여섯이라고. 학교에서는 내가 '보호자'라고. 그래서 올 한 해 우리 반 가장 큰 목표는 '안녕'이라고. 너무 흔하게 주고받아 별 감동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게 '우리 오늘도 다 같이 안녕'이라고. 이걸로 급훈하자고. 이 대목에서 몇몇 아이들의 눈빛이 더 유난히 반짝이는 게 느껴진다.


우리 반 단 하나의 규칙은 '소친대친'이라고. '소심해도 친절하고, 대범해도 친절하자고. 비여도 친절하고, 눈이여도 친절하라고'. '친절은 위로라고. 친절한 사람은 자주 웃는다고.' 친절하고 자주 웃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이만큼 만들어 온 거라고. 그 사람들이, 아니 인간이 위대한 건 좀 더 서로에게 친절한 방식으로 '날씨'를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그 과정의 기록이 동서양의 역사라고. 너희도 이미 꽤나 많은 태풍속 비바람을 뜨겁고  차가운 햇살을 잘 극복하고 살아남아서 고3이 된거라고. 고3이 되느라 애 많이 썼다고. 그러자 소심해 보이는 눈빛들이 눈웃음 짓는다.


그렇게 긴장한 아이들을 두 시간여 동안 잡아(?) 두었다가 보냈다. 매년 그러지만 자기소개서를 (엎드려 자느라) 제일 마지막에 제출한 (왼쪽볼에 패딩 코크자국이 생긴) 꾸러기를 남겨 자기소개서에 기록된 아이들 연락처를 내 폰에 저장 좀 해달라고 부탁한다. 꾸러기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이걸 다요?' 한다. '어? 왜 바쁘냐? 시간 안되면 괜찮아.' '아, 아뇨. 해볼게요'. 그 옆에 나란히 앉는다.


'어제 몇 시에 잤어?' '1시 반쯤요'. '뭐 했어?' '공부했죠' '무슨 공부?' '장사 공부요'.  내가 매년 첫 번째 아이와 첫 상담하는 방식이다. 올해 꾸러기 역시 솔직 담백하다. 보통 꾸러기들은 떨어지는 비 같다. 소리를 많이 낸다. 그런데 소리들 사이에 투명한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진심을 알아채면 비가 그렇듯이 담긴 그릇에 맞게, 만난 대지의 상태에 맞게 소리없이 스며든다. 그래서 소리가 나는 꾸러기들이 좋다. 사실 꾸러기들이 소리가 많은 게 아니라 학교가 너무 조용(한 것을 강요)한 거여서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다.


엊그제 금요일. 온 세상이 하루 만에, 아니 몇 시간 만에 봄날이었다. 낮 기온이 십도 가까이 올랐다. 얇은 티 두 장 겹쳐 입고 가슴 활짝 펴고 온 동네를 마음껏 하루 종일 걷고 싶은 날이었다. 창가로 들이치는 햇살이 전날 아이들이 남겨 놓은 자기소개서에 부딪혀 눈이 더 부셨다. 올해 만난 아이들은 오래전 어느 노래가사 '둘이 되어버린'이 떠오르게 만든다.


스물여덟 모든 아이들이 자기 관심분야를 또렷하게 써냈다. '아직 고민중이에요, 선생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직업 훈련가요'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기자가 되고 싶은 아이가 둘, 음악 하는 아이도 둘, 미디어를 하고 싶은 아이도 둘이다. S대 가고 싶은 아이도 둘, 피디가 되고 싶은 아이도 둘, 무엇을 할지 아직 고민하는 아이도 둘, 체육 교사가 되고 싶은 아이도 둘, 군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도 둘, 그림 그리는 아이도 둘.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둘 중에 내 눈에 번뜩 들어찬 아이 둘이 있었다. 그것은 (육사에 가서)군인이 되고 싶다는 둘이 모두 여학생인 것도 아니고, S대 언론 관련 학과를 가겠다는 우리반 1등 아이의 진짜 꿈은 '배우'라고 깨알같지 고백한 내용 때문도 아니었다. 3월부터 학교가 끝나면 그 이후 학습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원고 작업'이라고 쓴 거였다. 그 아이 둘 다 진로 희망이 '작가'였다. 둘 다. 소설가.


내 기억이 맞다면 26년간 아마 처음이지 싶다. 고3에 와서 그것도 한반에 둘이나 직접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아이들이 있다는 게. 게다가 '하루 30분 이상 원고 작성'이라고 구체적으로 자기를 소개한 아이는 더더욱 없었다. 반 아이들 전원이 (강제)야자를 할 때도 슬쩍 빼줘서 홍대에 가서 밴드를 하고 체육관에서 복싱을 하고 야자하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내내 그림을 그리게 해준 아이들은 있었어도.


내가 이렇게 기분 좋게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흔이 넘어서야 '써보자'라고 했던 내가 보여서 그런 걸까. '같이' 무언가를 있겠다 싶어 져서 그런 걸까. 아직 아이들을 만나 상담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원래 비도 눈처럼 소리가 없다. 내릴때는 비도, 눈도 그 자체로 비다. 그냥 눈이다. 다만 비는 눈보다 달려드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소리를 낸다. 같은 비 여도 가랑비는 소나기보다 소리가 덜난다. 이슬비는 소리 없이 스며든다. 하지만 눈은 비가 요란하게 떨어져 소리없이 스며들때, 그제서야 슬쩍 쌓이는 소리를 가지런히 내뱉는다. 같은 듯 다른 비와 눈이다. 


같은 비라도 내릴 때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양철 지붕, 콘크리트 담벼락, 넓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아스팔트, 맨홀 뚜껑, 깊게 패인 하수구 바닥, 위아래로 곧게 뻗은 플라스틱 배관, 구불거리며 한없이 이어진 가스 배관 그리고 또 다른 비. 분명 올해 우리 반은 달력을 따라 넘어가는 진짜 계절에 관계없이 비와 눈과 바람과 햇살, 천둥과 번개가 되어 각자의 방식대로 다 다른 속도로 소리를 내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맞이할 건가 보다.


이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났으니 때로는 요란한 양철 지붕이 되고 때로는 빈틈없는 콘크리트 담벼락이 되고 때로는 연약한 나뭇잎이 되어 보면서 그 소리에 맞장구를 쳐봐야겠다. 친절하게, 웃기면서. 그나저나 일폭탄이 기다리고 있고, 4월 중순까지 한달을 넘게 야근(상담)을 해야하는 부담에도 소설가가 꿈인 아이들을 빨리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보면 일주일이 참 더디간다. 하하 너무 편애하는 건가. 절대 티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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