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Feb 11. 2024

눈물나게 나른하게 다시 찬란하게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13

'대한민국 육군은 다 같은 편이니까요!'


#1

설 전날. 두 시간이 넘게 꼿꼿이 앉아 화면에 빠졌던 순자씨는 '깊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하고 비지엠이 울리는 동안 벌떡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면서 소곤거리듯 외친다. "잘되었다, 잘되었어, 참 잘됐다'.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의미일꺼다. 오일년생인 순자씨는 나를 스물 하나에 낳았다. 한 살 많은 경호씨가 군에 간 사이에 혼자 키웠다. 엄마로 만나 한참을 어머니라 부르다가 얼마 전부터는 일부러 나는 엄마라고 다시 부른다. 그냥 그러고 싶어졌다, 갑자기. 하지만 오랫동안 스스로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의 이름은, 육남매의 소중한 막내 여동생, 막내 누나 순자다. 


경호씨는 내 나이 여덟, 아홉 살 때 뜨거운 서남아시아의 모래밭 위에서 건설 노동자로 삼 년 넘게 살았다. 그때는 산업 역군이었고, 이도 좋았고, 소화력도 좋았다. 덩치는 지금의 두 배였다. 간혹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안타깝게 조기 귀국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잘 먹고 더 잘 버티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단다. 그러는 사이 강원도 산골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내가 상주가 되어 경호씨 대신 맨 앞에 서서 질척한 논두렁을 걸었다. 설만 되면, 추석만 되면 그 핑계로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자식들 앞에서 일부러 그 아픔은 감추느라 한 번도 먼저 자신의 아버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설날, 추석날 레퍼토리 중 하나가 '영국 기자'다. 


아마, 한국에 있던 영국 특파원이 신군부와 관련한 것들을 촬영했고, 그걸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서, 산업 역군들이 있는 장소에서 '비밀스럽게' 상영을 했었던 것 같다. 오피셜은 아니지만, 답답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삼십 대 경호씨의 가슴팍에 깊게 새겨졌었나 보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육 남매 장남의 울분에 조국의 아픔이 범벅이 되었을 거다. 그때부터 경호씨의 가슴에 불씨가 일기 시작했었나 보다. 어정쩡하게 정의로운 척하는 나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지금도 정치사에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  


50년 넘게 경호씨의 새벽 도시락을 싸온 순자씨.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순자씨의 새벽 김밥을 눈치없이 여전히 좋아하는 경호씨는 지금도 아파트 경비일을 하느라 도시락을 챙긴다. 그 도시락을 순자씨는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싼다. 미리 싸놓으면 까끄러워 어떻게 먹느냐며. 그 세월만큼 챙겨 온 축하 받지 못한 명절.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들보다 본 적도 없는 조상들을 더 많이 챙겨야 했던 죽은자들을 위한 축일. 그동안 너무 애썼다고 스스로를 슬쩍 토닥이는 정도도 순자씨는 아내덕에 그나마 이제야 흉내를 내보는 것 같다. 


순자씨는 73년전 음력 설전날 태어났다. 번들거리고 밍밍한 음식들을 만들어 내느라 생일상을 챙겨 받기는커녕 생일인 것도 잊고 산 지 오래다. 그것 역시 아내덕에 가능했으리라. 내가 봤을 때 아마 경상도 싸나이 경호씨는 슬쩍 손 안되고 코 푼 상황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더 우리의 의견에 적극적이게 바뀌었다. 쉬는 날 순자씨를 위해 설거지를 도맡아 하시는 걸 보면. 아내한테 설거지도 못하게 하시는 걸 보면. 점심 생일상을 푸짐하게 차려 드시고, 강변 산책로를 아홉 식구들(태평양 건너 혼자 사는 스물하나 아드님만 빠지고 우리 셋, 경호씨, 순자씨 그리고 동생네 넷)이 순자씨를 선두로 강변 기차놀이 하듯 한참을 걸었다. 맨 앞서 가는 순자씨는 싸늘한 강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풀거리듯 걸었다. 팔만 몇 번 휘저으면 금방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다. 



#2

설날 저녁. 결혼하고 22년 만에 처음 맞는 설날 저녁이었다. 우리가 성환씨와 옥희씨를 뵈러 가지 않고 두 분이 손잡고 우리 집으로 오신 날이. 성환씨, 옥희씨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니신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에게 항상 그러신다. '지금부터 손을 잡아야 우리처럼 되어서도 잡을 수 있어'하고.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언제나 일흔아홉 옥희씨가 두 살 오빠 성환씨 손을 먼저 잡아당겨 잡는다. 그럴때면 멋쩍어 하면서도 슬쩍 내미는 걸 보면 성환씨 역시 경호씨처럼 손 안되고 코 푸는데 선수 같기만 하다. 


성환씨 옥희씨가 힘껏 아내 삼 남매의 10대, 20대를 거둬 먹였던 포도나무 우거진 마당 있는 집이 지금 더 편안한 세상으로 재작년부터 재개발 중이다. 내년 여름에 입주라고 기대에 차 계신다. 그전까지 처남네와 우리는 그 마당 넓은 집으로 다 모였다. 그러다 몇 해 전부터는 두 분이 처남내로 가 계시면 우리가 설날, 추석날 당일에 처남네로 출발한다. 하지만 올 설날 당일에는 처남이 두 분을 모시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렇게 우리 집은 어제의 아홉 식구에 이어, 설날에는 여덟 식구가 다 같이 식탁 위에 모여 앉았다. 


역시 아내가 미리 예약해 둔 오리백숙집. 경호씨 순자씨도 아주 좋아하는 곳이다. 넉넉하게 드시고, 맥주 한잔까지 한 성환씨는 기분이 좋아지시면 언제나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웃는다. 그런데 소리는 내지 않는다. 여든 하나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다. 열아홉 따님이 앨범에서 찍어 폰에 넣고 다닐 정도로 잘 생겼던 흑백속 이십 대 아이돌. 그때의 미소다. 드러나는 잇몸이 진한 선홍빛으로 아주 건강해 보인다. 여기저기 안 좋은 데가 많지만, 보청기가 없으면 전혀 들리지도 않지만, 언제나 별일 없다, 그냥 다 좋다, 전화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분명 그 여전한 미소의 비결이지 싶다.


보통의 또래에 비해 진보적인 옥희씨. 아마 오랜 기간 자영업자로 살아온 게 큰 영향이지 싶다. 네 분 중 가장 거침이 없다. 하지만 가장 눈물도 많다. 노래방에서 나와 손을 잡고 둘이 노래를 부를 때도 소리 없는 눈물이 한없이 여러 번 흘렀었다. 그 눈물을 아내가 닮은 게 분명하다. 열아홉 따님도 아내처럼 코가, 볼이 빨개지는 것도 꼭 같다. 그런 옥희씨는 성환씨 옆에서 화면에 몰입 중이다. 우리 집 거실에는 소파도 tv도 없다. 덩그러니 책장 하나에 화분 몇개만 있다. 대신 자그마한 빔을 이동식으로 설치하고, 거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자동 대형 스크린으로 내리면 영화관이 된다. 


순자씨, 경호씨, 옥희씨, 성환씨 모두 그 영화관에서 <서울의 봄>을 처음으로 봤다. 이번 설 연휴만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정말 잘했다 싶어질 때도 없다. 우리 부부는 극장에서 이미 두 번을 본 후 어제 한번, 오늘 한번 이렇게 네 번째다. 그래서 어제, 오늘은 경호씨 순자씨 부부. 성환씨 옥희씨 부부 옆에서 아주 편안하게 기대어 화면을 보는 당신들을 어둑한 빛 속에서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다. '아범? 저게 그이지?', '저런, 저 쳐 죽일 놈'하는 추임새에 맞장구 하면서 그들을 한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보안사령부 피로연 장면. '이제, 오늘부터 우리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민을 위해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우리는 하나다!'라고 화면에서 외치는 순간, 옥희씨는 화면 속에서 그놈 멱살을 잡은 듯했다. '아이고, 아이고 저 미친놈이, 저 놈이, 지 x 하고 있네!'

 

경호씨는 동생네 막내 벼리를 놀리는 게 재밌어한다. 언젠가는 새배를 한 뒤, 똘망한 눈으로 무릎인 채 바라보고 있는 벼리 앞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한참을 지갑 속을 들여다본 뒤, 난감한 표정 연기에 들어갔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달랑 꺼내어 내밀면서 그랬다. '어허, 이런, 할아버지가 경제 사정이 안 좋아 이것밖에 없네'. 한참을 참고 있던 벼리의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가득 찼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경호씨. 올해는 좀 더 강력했다. '아, 참 벼리야. 그거 알지? 나이 계산하는 법이 바뀌면서 세뱃돈도 이제 주지 못하게 법이 고쳐진 거. 세뱃돈이 사라진다는데?' 하고.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동생이 미리 집에서 그렇게 말을 했었나 보다. 벼리가 인터넷에 들어가 아무리 찾아봐도 세뱃돈 못주게 한 법은 없었다 우기다가 우리를 만난 거란다. 그 바통을 경호씨가 이어받은 거였다. 그랬더니, 열 살 벼리가 냅다 소리쳤다. '아, 000 바뀌고 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없어'하고. 우리 식구들은 모두 주저앉았다. 모두의 눈가에 행복한 눈물이 흥건히 스며 올라왔다. 열아홉 따님도 벌써 웃으면 눈물이 나온다. 웃겨서도 죽을 수 있구나 싶어 하는 것처럼. 그러는 사이 올해 중학생이 되는 동생네 큰 딸이 나에게 다가와 손을 슬쩍 꼬옥 잡았다. '큰아빠' 하면서. 그게 다였지만, 다 안다. 


내 앞에서는 언제나 말이 없던 처남네 외동딸도 이제는 그 또래의 아이들처럼 거침없이 재잘거린다. 이제 엄마, 아빠 말고 가끔 만나는 고모, 고모부도 언니도 오빠도 가족이구나 하는 걸 몸으로 느끼는 것같다. 만났을 때 많이 웃어야 그렇게 오래 오래 좋은 기억으로 남을껀데 말이다. 어른들은 왜 그렇게 자주 진지하게 되는지 너무나 궁금했을꺼다. 우리 어릴적 어른들이 막연하게 무서웠던 것처럼. 


이 모든 장면이 다 경호씨, 순자씨, 성환씨, 옥희씨 덕분이라는 걸 너무 잘 안다. 넷이서 각자 또 같이 305년을 그렇게 잘 살아낸 덕이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자식은 부모덕에 이 세상을 사는 거니까. 하지만 가족은 언제나 한 팀이 되어야 한다는 게 주문이 되고, 강박이 되어 우리의 팍팍한 삶을 더욱 건조하게 만드는 것도 다 안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한 팀이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협력적인 제안이나 실천 없이. 당신들이 그렇게 묻지 않고 받아들인 일상이 일생이 되었을 것처럼. 원래부터 한 팀이었으니까, 한 팀인 거지라는 애매한 신념을 가지고. 쉬는 날 정말 쉬지 못하는 이유였다는 것도. 


명절. 해마다 지켜 즐기는, 계절적, 자연적 정서와 민속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축하의 날. 오래전에 먼저 살아낸 이들을 기억하고 감사해하는 민속적 요소만큼 지금 곁에 같이 살아내느라 애쓰는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한 편이라는 걸 계절마다 축하하고, 같이 자연을 누리는 것을 축하하는데만 다 써도 모자란 시간들이다. 여든 하나 성환씨부터 아홉 살 벼리까지. 만나면 힐링이 되고, 진짜 배부르고 나른하게 행복한 쉬는 날의 추억이, 경험이 쌓이는 날들이. <서울의 봄>을 이미 세 번이나 본 열아홉 따님이 어제는 순자씨 손을 꼭 잡고, 오늘은 성환씨 가슴에 기대어 마치 처음 보는 듯하게 봐준 이유도 우리가 한 편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거다. 


몇 주 전 아내덕에 시작한 거실 대청소. 버리고 기부하고 또 버리고 기부하면서 넓어진 거실. 쇼파도 없고, 의자도 없는 거실 덕분에 격식없이, 허물없이, 자기 방식대로, 원하는 자세로 눕고, 기대고, 앉아 있을 수 있어 더 가깝게 느껴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침묵 공공칠빵을 하면서 소리없이 웃느라 눈물 흘리는 가족들 사이 사이로 느껴진다. 성환씨, 옥희씨, 순자씨, 경호씨한테 기대고 손을 잡고 부비면서 마음껏 웃고 세뱃돈을 야무지게 꼬깃꼬깃 챙겨 담는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말해 준다. 


명절은, 진짜 명절은 지금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열렬히 축하하고, 기념해야 하는 거라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의 봄날은 지금이라는 것을. 가족은 우리 각자가 선택한 적이 없지만, 선택할 수가 없지만, 얼마만큼 사랑하고 어떻게 아껴줄지는 충분히 선택하고, 실천할 있는 것이라고. 몇살의 아이들도 몸으로 느끼는 것을 우리가 모를 없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원래 같은 편으로 찬란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이전 12화 위험한 사람들, <그아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