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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21. 2024

비웃지 말고 넉넉하게

[오늘도 나는 감탄寫] 22

푹 못 자고, 제대로 못 먹고 모인 아침 일찍. 06년생 스물여덟 명의 안녕을 확인한 후 복도를 지나가는 데 앞서 가던 두 남학생이 나란히 걸어간다. 떡 벌어진 어깨의 왼쪽 아이가 왜소한 오른쪽 아이에게 야단을 맞는 듯했다. 앞에 말은 잘 듣지 못했다. 내가 먼저 지나쳐 앞서가는 데 대뜸 화내듯 쏘아붙인다. '사는 게 장난이냐?'


맞다. 사는 게 분명 장난은 아니다. 그 진실을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 알아버린다. 그런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어른스럽지 못하게 장난 노는 어른들의 영향이 크다. 제때 사과할 줄 모르고, 미안해야 할 상황에 오히려 더 성질을 부리고, 먼저 사과하면 자신의 삶마저 밀리는 것처럼 느끼는 어른들 때문에.


재미로 하는 짓(장난치다, 장난 끝에 살인난다, 장난꾸러기, 장난기, 장난질, 말장난, 물장난, 불장난, 소꿉장난, 손장난, 장난감, 흙장난)으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고 있는 장난의 옛말 작난(作亂)은 '예술'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연극'적 행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일상이라는 무대에 올라 선, 1인 다역의 배우이다. 태어나 30년쯤 배우의 자질을 배운다. 남이 써준 각본이지만 외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살아낸다. 다시 대략 30년 동안은 배운 역할을 써먹는다. 써먹으면서 다시 배운다. 그러는 동안 나보다는 남에게 더 주목하는 법도 배운다. 


마지막 30년은 자기 역할에 대해 돌아보고, 반성하고, 고치면서 그 무대를 아예 내려 올 준비를 한다. 무엇이건 천천히 배우고, 천천히 움직이고, 천천히 생각하고, 느릿하게 표현한다. 남보다는 나에게 더 주목하는 법을 그제야 배우기 시작하는 거다. 그래서 때로는 직접 쓰고, 그린다. 직접 만들고, 새로운 도전도 한다. 


그렇게 매 순간마다, 역할마다 각본에 충실한다. 어느 순간 각본 없이도 제 역할을 다 해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자기의 역할을 크게 아프지 않고 소화해 낸 것 자체가 진정한 '예술적' 경지에 달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느 날은 열정으로, 어느 날은 도전으로, 어느 날은 설렘으로. 어느 날은 미움으로, 어느 날은 사랑으로, 어느 날은 용기와 용서로. 그렇게 꼬깃꼬깃 접어 넘긴 하루하루의 갤러리가 마치 화들짝 놀라듯 피었다 며칠 만에 후드득 떨어져 길가에 나부끼는 꽃잎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요즈음은 턱없이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기실 나 남 할 것 없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어느 친구와 대좌하였을 때 내가 'X선생 댁에 매화가 피었다니 구경이나 갈까?' 하였더니 내 말이 맺기도 전에 그는 '자네도 꽤 한가로운 사람일세'하고 조소(嘲笑)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먼산만 바라보았습니다. 

_ 1948년에 발행된 김용준의 근원수필 <매화> 편



일방적인 장난은 언제나 말장난, 손장난에서 시작한다. 친하다고, 선배라고, 어른이라고, 못 한다고, 못 산다고. 그렇게 어른이 되고도, 나이를 더 먹고도 자신이 아닌 남(과 비교하는 삶)에게 더 주목할 때 날숨에 섞인 기운이 바로 조소(嘲笑)이다. 삶이 묻어나는 각자의 예술성과 희로애락에 대처하는 연극적 요소는 전혀 없는.


비웃음을 뜻하는 이 한자어 조가 참 신기하기만 하다. 아침 조 옆에 입 구를 열어 놨다. 특히, (자신의 예술성과 삶의 연극적 요소에 충실하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 상태인) 아침에 입을 (잘못) 열면 비웃음으로 전해질 수 있다, 는 선인들이 오만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들어 내었지 싶다.



커피를 쏟았는데 휴지로만 닦아서 끈끈합니다. 혹시 물건 올려두실 때 참고하세요. 내일 물티슈로 닦겠습니다. => 물걸레로 잘 닦았습니다. 시민정신이 훌륭하십니다. 좌석 1일권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00스터디 카페(010-0000-0000)

_2024년 4월 어느 날. 따님이 발견하고 찍어 보낸 어느 십 대 학생과 60대 카페 사장님의 필담 메모지 



우리는 아침에는 아침이어서, 오후에는 오후여서 피곤하다. (거의) 매일이 그렇다. 아무리 비타민을 A부터 Z까지 다 챙겨 먹어도 피곤할 거다. 사는 게 장난이 아니어서 피곤한 거니까. 서로가 만나는 그 순간이 조금씩 다 그런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어느 시기에, 어떤 역할에 있든 간에 하루를 어떻게 사는 게 넉넉하게 사는건지는 아주 오래된 미래이지 싶다. 누구에게나 남은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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