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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14. 2024

느닷없이 찾아 온 기차

[오늘도 나는 감탄寫] 21

연속 2개 반 수업으로 더욱 노곤해진 몸 덕분에 오랜만에 자리에 잠깐 앉았다. 바로 세 번째 반 수업을 들어가야 한다. 창밖으로는 봄이 가득하다. 꽃눈이 흩날리고 바닥에는 온통 꽃길이다. 그런데 날은 후끈하다. 얇은 긴 팔 티셔츠 소매를 연신 걷어 올려 고정시킨다.  


의자 등에 나를 마음껏 기댄다. 눈을 살며시 감는다. 봄 햇살이 어김없이 블라인드 끝 부분으로 파고든다. 그렇게 내 눈가를 비춘다. 따끔하게 따뜻하면서 포슬하게 느껴진다. 오늘도 정말 한참만에 만난 듯한 친구들의 열렬히 투닥이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그때 몸이 부웅 뜨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들 목소리 사이를 지나쳐 기차가 나에게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급하지도 않게 여유롭게.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육중한 몸통에 어울리지 않게 가늘게 뿜어내는 기적소리가 조금은 방정맞다. 비둘기호다. 기관사 머리 위에서 뒤에 따라오는 열차들을 이으면서 내달리는 파란색 띠에 검댕이 짙게 묻어 있다. 아닌가, 무궁화호인가. '커덩커덩, 커덩커덩, 커덩커덩, 커덩커덩'. 걸걸하게 탁한, 육중한 기계음이.


살며시 눈을 떴다. 창문을 반쯤 가린 블라인드 아래에 숨어 있던 봄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눈동자 가득 파고든다. 그때 파란 하늘이 순간 왕벚나무 꽃잎처럼 분홍을 띤 하얀색으로 번쩍인다. 그 사이로 베이지색 바탕에 빨간 줄이 날렵하게 그려진 무궁화호가 뒤이어 내 달리는 게 선명하게 들린다.


아까부터 들렸던 경쾌한 기차 바퀴 소리다. 연속 세 개의  수업에다 가슴이 아파 휴직에 들어간 김샘 수업 하나까지. 점심을 앞뒤로 연속으로 수업을 하고 앉았더니 오후 가득 나른하다. 그 나른함속에서 내 귓전에 스쳐 지나가던 기차소리가 '취~이~익'하는 소리도 없이 단박에 멈췄다. '이제, 좀 쉬자'


이내 탁탁탁, 탁탁탁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제야 눈을 뜨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베이지색 벽면에 기다랗게 내걸린 거울. 왼쪽 아랫부분이 무지개처럼 금이 가 깨져 있는 부분을 노란색 꽃무늬 스티커로 언제적 누군가가 조르륵 붙여 두었다. 작은 것부터 큰 순서대로. 가장 큰 꽃무늬 스티커가 붙어 있는 바로 그 아래.


네모 반듯한 프린터기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3년 가까이 쓴 출력 속도가 꽤나 빠른 프린터기다. 그 프린터기가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 내며 프린트물을 내뱉은 속도가 봄날, 날리는 벚꽃 사이를 내달리던 비둘기호가 되었다 무궁화호가 되었다 했던 거다.


어느 분이 올해 고3 4개 반(큰 교무실옆에 있는 우리 교무실에는 4개 반 선생님들이 모여 있다) 120여 명의 아이들을 위한 2024학년도 질병 및 기타 결석 신고서, 출석인정 신고서, 학부모 의견서를 수북이 출력해 놓으시려나 보다.


 '띵띠리 딩딩 띠리리리링~'.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비둘기호, 무궁화호의 철바퀴 소리를 단박에 밀어낸다. 하지만 봉긋하게 폭신했던 파란색 의자. 내 머리맡에 갓 씌운 듯한 하얀색 의자 등받이 천. 뒷머리를 부비면 귀뒤를 지나 스며들던 익숙한 비누 향기가 나를 따라 걷는 듯하다.


천천히 가방을 챙겨 복도로 걸어 나갔다. 복도 끝 1반까지 천천히 걷는다. 네 개 반을 지나친다. 창문 안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풍경 같다. 내 뒤로 주황색 망사천에 수북이 쌓인 구운 계란을 싣고 초록색 사이다 병이 살짝 살짝 부딪히는 먹거리 판매용 카트기가 따라오는 것 같다.


1반 앞문을 벌컥 열면서 내질렀다. '얘들아, 안녕! 그럼 오늘도 우리 나라로 신나게 떠나 볼까?' '네~'하며 해맑게 웃어주는 (푸석한)아이들 사이 사이를 지나 어슴프레 파랗던 여름 새벽 플랫폼에 나를 떨구고 혼자 내달리던  기차의 벌건 꽁무니가 창밖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올해 유난히 알록달록한 열아홉 아이들이 덜 아프고, 안 아파서 느닷없이 찾아 온 기차가 데려다준 출력물(?)들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언제나 유쾌했던 김쌤이 올해를 잘 보내고, 다시 신나게 함께 했으면 너무 좋겠다. 따님이 오랫동안 준비중인 5월 큰 시험을 끝내고 제일 먼저 하고프다던 기차 여행을 잘 갔다 돌아올 때 플랫폼에서 기다리다 손잡고 같이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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