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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18. 2024

이유 없이 다정하고픈 이유

[오늘도 나이쓰] 30

조례가 끝나고 나오는데 여리가 냉큼 따라 나온다. '어? 왜?' '아, 선생님. 제가 오후에 주르륵 수행평가인데요, 자료가 들어 있는 태블릿을 오늘 못 챙겨 와서요. 점심시간에 집에 좀 다녀와도 될까요?' '그래? 알았어, 그럼. 점심 먹고 와'


오전 수업이 단박에 지나가고, 점심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4교시가 없었던 나는 챙겨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뒤였다. 양치를 하러 가려는데, 여리가 5층 문 앞에서 빼꼼거렸다. 자그마한 몸짓이지만 눈망울은 항상 한없이 크고 깊고 진심인 아이다. 


'밥은?' '아직이요' '잉? 집에 갔다 오는데 얼마나 걸리는데?' '한 30분 조금 넘게요' '어떻게 가려고?' '걸어가면 돼요. 자주 걸어 다녀요' '수행평가는?' '5,6,7교시 세 시간 연속이요' '배고프지 않겠어?' '네, 괜찮아요. 수행평가가 더 급하죠' 하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저기, 어, 거기에 외출증 양식이 있어. 쓰고 있어' 하고 양치실로 건너갔다. 얼른 돌아와 보니, 양손으로 자그마한 외출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싸인 좀....' '아, 맞다. 싸인' 하면서 서랍에서 도장을 찾아 꺼냈다. 그러다 문득, '샘이 태워다 줄까?'


집 앞 카페에 가끔 들른다. 그때마다 가끔 마주친다. 서른이 넘은 또 다른 여리를. 그 여리가 지금껏 서너 번 그랬다. 가져간 텀블러로 늘 주문하는 따듯한 아메리카노 그랑데 샷추가. 그 옆에 컵과일이며, 쿠키 등을 같이 올려서 내밀었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을 못 하는 나에게. 엊그제는 버터바를 하나 살짝 올려놨다. 좀 다행인 건 정식 매니저란다.   


올해로 선생 나이 스물일곱이다. 27년 전 발령을 받았을 때, 많은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지금은 명퇴를 하신 한 분은 오랜만에 태어난(?) 아들처럼 귀하다며 연신 건배를 하자고도 했었다. 그렇게 그분들로부터 아이들을 다루는(!) 법을 급속하게 터득한 뒤, 그 힘으로 한 10여 년 넘게 버티었었다. 


최대한 무섭게, 냉정하게, 인간적이지 않게. 왜 그래야 하지,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랬다. 실제로 그때의 여리와 벼리들은 쎈(!!) 녀석들이 꽤나 많았다. 지금 돌아보면 나도 살아내느라 겨를이 없어서 그랬겠지 싶으면서도. 너무 미안하다. 


기특하게도 지금도 찾아오고 연락하는 몇몇 아이들 덕분에 어떻게 살아내는지 궁금한 수많은 쎈 아이들을 더 잊을수가 없다. 원래 쎈 게 아니라 그때의 집안이, 또래가, 상황이 쎄야만 했던 아이들을. 좀 더 친절하고, 조금만 따듯했었다면 어땠을까. 


마구 휘몰아치던 광풍 속에서 나 혼자 봄볕 산들바람으로 살아낼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도 지나고 보니 다 변명이다. 용기가 없었던 거다. 아니, 아이들을 잘 몰랐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선생이 되고 싶은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리네 아파트 앞 정문 상가에 잠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그런데 채 몇 쪽 읽기도 전에 여리는 다시 나타났다. 하얀 셔츠에 주홍색 타이를 멘 자그마한 체구의 상체가 앞뒤로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했다. 뛰어갔다 뛰어 왔나 보다.  


'선생님?' '어'하고 대답을 하면서 룸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여리를 쳐다봤다. 입술을 앙 다물고 속으로 숨을 고르고 있다 나와 눈빛을 잘 맞추지 못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점심은 어떡해요?' '벌써 먹었지. 도시락 싸가지고 오거든' '아, 다행이에요. 이렇게 태워다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처음이에요, 선생님이 이렇게 태워다 주시는 게' 


'그래? 오늘 타이밍이 잘 맞아서 다행이야. 알지?' '네? 뭘요?' '수행평가 잘 봐야 하는 거. 1점당 천원이거든' '네?' '여리, 너처럼 수행평가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이 앞으로도 또 샘한테 찾아올 거잖아. 그 아이들을 격려(!)하려는 재단을 하나 만들라고. 파운데이션 지담. 거기에 기부금을 좀 내줘야겠어. 수행 만점을 못 받으면 1점당 천원을' '네? ㅎㅎ. 아, 저는 못 내겠는데요. 만점 받을 거거든요 ㅎㅎ'


시답잖은 농담을 유쾌하게 받아주는 여리에게 나의 미안함을 대신 다 사과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유 없이 계속 사과하고 싶다. 좀 더 친절하게, 좀 더 여유 있게, 조금만 더 다정하게. 어릴 때 커 보인 어른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대한 경험이 나부터도 없어서 어른이 되자마다 꼭 그렇게 닮아갔던 게 분명하니까.  


'자 다 왔다. 여기서 먼저 내려, 얼른 올라가. 준비 잘해. 여리, 파이팅. 알지? 파운데이션 지담!' '네, 쌤. ㅎㅎ. 잘 볼게요. 너무 감사합니다.' 뒷문을 살며시 두 번에 나눠 닫고 언덕을 뛰어 올라가는 여리뒤를 봄햇살이 밀고 올라간다. 


주차를 하고 올라가는 그 언덕. 여리가 종종거리며 먼저 뛰어올라 간 길. 오랜만에 후덥 하게 햇살이 좋다. 이 햇살을 지금, 여기저기서 같이 다들 잘 쬐고 있을까. 미국 간 여리도, 워킹망 여리도, 혼자가 된 워킹대디 벼리도, 드디어 셰프가 된 벼리도, 하늘로 먼저 올라가 별이 된 여리도. 


'얘들아, 어때? 괜찮지? 잘 지내지?'

'미안해, 많이. 더 친절하고, 좀 더 다정하고, 조그만 더 기다려주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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