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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11. 2024

오늘도 '막' 사는 연습 중입니다

[오늘도 나이쓰] 29

며칠 전. 아내가 감탄을 하면서 휴대폰에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전날 온 사진은 땅속처럼 어둑한데 그날 온 사진은 런어웨이를 해야만 할 것처럼 총총총 엘이디 등이 천장에서 환하게 빛나는 사진이었다. 집 앞 스터디 카페를 드나드는 따님이 찍어 아내한테 보낸 거였다. 


어느 날 밤. 따님이 자정이 다 되어 내려오는 통로에 등이 전혀 켜지지 않았었나 보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스터디 카페 사장님한테 문자를 남겼고, 그다음 날 사장님이 직접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아내의 묘사 그대로) 차분하고 성실한 느낌으로 배운듯한(?) 중년의 남성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너무 미안해했다면서. 


통로가 환해져 CCTV까지 보였던 밝아진 사진이 '따님을 위해서 얼른' 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사장님이 지킨 약속의 결과였던 거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따님은 다시 찍었던 거다. 이야기를 전하는 아내의 표정은 엘이디 등처럼 참 환했다.  


며칠 시간이 지나도 업무를 보는 중간에도 환하게 맑은 미소를 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찍부터 늦게까지 가장 피곤한데 가장 명랑한 따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덕에 문득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아빠보다 열 살은 많으실걸' 하던 스터디 카페 사장님을 마음껏 상상을 해 봤다. 


아주 오래 전의 나라면 어땠을까. 여러 상가가 들어찬 대형 건물. 관리 주체도 아닌데. 사장님의 반응과 조치는 '당연한 일'이고 해야만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여겼을 거다. 당연한 일, 반드시 해야 할 일, 책임져야 할 일의 경계를 따박따박 따지면서 나에게 가장 엄격하던 때였으니까. 


말, 행동, 생각을 꽁꽁 묶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몸과 그 마음의 영역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신념이라 여기면서 고집을 부린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고 퇴근하고, 또다시 출근하고 퇴근하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출근했다 다시 퇴근해야 하는 6년 전 가을 어느 날. 집 근처 넓은 잔디 광장이 통유리에 대형 스크린처럼 비추어 들이치는 북카페에 앉아 있었다. 숨소리도 거슬리던 4층 열람실 대신 젊은 엄마들의 소곤거리는 수다와 그 아이들의 해맑은 소음이 가득한 1층 창가에.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나는 지금껏 가짜 T였구나, 하고. 그날 그렇게 어른이 되고, 밥 벌어먹고살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썼다. '막'이라는 말이 지닌 '바로 지금, 조금 전', '마구, 되는대로'의 두 가지 의미를 뒤섞어서. 떠오르는 대로 마구 썼다. 떠오를 때 바로 썼다. 그렇게 그 이후 틈틈이 계속 썼다. 


늘 성실하게 따라만 가던 뒷바퀴가 앞바퀴에게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한 거다, '막'. 지금, 수북한 기록들을 천천히 다시 읽으면서 낯설고, 창피하다. 안타깝고, 또 눈물이 차오른다. 동시에 뿌듯하다. 분명 그 뿌듯함이 코로나가 감기처럼 자리 잡던 지난 일 년간 매일 새벽을 일으켜 세웠던 힘이 되었을 거다. 


지금도 단박에 뒷바퀴로만 살아갈 수 있지 싶다. 그렇게 살아온 내가 지금의 나보다 수십 배는 더 오래니까. 그래도 좋다. 너무 좋다. 오십이 넘게 살아오면서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나 스스로 먼저) 질투나 경쟁심이 들지 않고 진심으로 좋은 것, 그게 '막' 쓰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흡족하다. 아주 흡족하다. 


게다가 다행이다. '막' 쓰지만 않고 꾸준하게 읽을 수 있어서. 이 새벽이 나의 의지대로 고스란히 매일매일 주어져서. 무엇을 만들어 내지 않아도 좋다. 다 좋다. 얼마간 쓰지만 않으면, 또 얼마간 읽지만 않아도 원래처럼 정갈하지만 건조하게 살아낼껄 알기 때문에 더욱.  


'막' 쓰는 덕에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입이 아니라 몸으로 마음으로 진하게 느끼기 시작하니까. 오늘의 햇빛도, 산책로에서 나를 감싸준 바람도, 나처럼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풀 한 포기도. 꾹 참다 참다 하루 이틀 만에 후다닥 솟아나는 것 같은 온갖 봄들도 잰걸음으로 지나치지 않으니까.


멋진 어른 사장님 덕에 앞으로도 쓰고, 또 쓸 이유가 생겼다. 아내의 미소와 따님의 명랑한 목소리 덕에 한없이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써야 할 이유고 읽어야 할 이유니까. 나와 내 주변이 꼬깃꼬깃한 '안녕'으로 연결되어 있는게 가장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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