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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19. 2024

BanTi가 알려주는 것

[오늘도 나는 감탄寫] 26

요 며칠 동네에서 극득춘, 김양파, 유진스~, HUUUNNI, 특별한 미남, 특출난마녀, mbapae, 422, 미소녀, 괜찮툭 딱.... 같은 닉네임을 알록달록한 옷 등판에 새긴 아이들이 꽤나 보입니다. 흔히 '반티(class uniform)'라고 불리는, 오직 하루를 위해서 입는 옷이죠. 5월 연휴가 끝난 후 엊그제까지 스포츠 한마당이었읍니다. 

 

스승의 날이 부처님 생신날 빗소리에 살짝 묻혀 조용히 잘 지나간 다음날. 저도, 우리 아이들도 참 오랜만이었네요. 초록한 친환경 인조 잔디 위에서 먼지 없이 한 번에 올려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눈부신 파란 하늘. 그 조합 사이에서 아이들이 알록달록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본 게.


아내와 저는 지금도 머리맡에, 집을 나가는 문가에 출근할 때 꼭 챙겨야 하는 이런저런 것들은 전날 밤에 미리 내어 놓습니다. 이런 습관은 분명 머리맡에 놓아주셨던 엄마의 하얀 운동화에서 출발한 게 분명합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하얀 운동화가 반티로 부활한 것이고요. 


코로나로 너무 한참이나 잊혀졌던 하얀 운동화가 말이지요. 그래서 더욱 반티는 단순한 유니폼이 아닙니다. 같이 준비하고, 같이 입는 하루 동안 다양한 사회학적 수사들을 살짝살짝 경험하게 되니까요. 


우선, 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교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여전히 강하죠. 학생이라는 사회가 던져 준 겉옷에 가려진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고민하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같은 팀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 속에서 내가 해내어야 할 역할은, 내가 저항해야 할 대상은,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잘하고, 어떤 상황을 좋아하는가. 


반티는 또 소속감, 연대감이 주는 사회적 안정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이 뽑지 않은 대표가 응원단장으로 나서고 스스로 정하지 못한 구호를 함께 하루 종일 외쳐야 합니다. 내가 모르는 나의 대표를 위해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질러야 합니다. 갑자기 주어진 같은 목표를 위해 달리고, 조심스레 건네주고, 버티고, 당기고, 손을 꽉 잡아야 합니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엇보다 반티 한 장을 통해 벅찬 기쁨과 몸이 기억하는 아쉬움을 짧고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경쟁에 대처하는 법, 이겼을 때, 졌을 때 마음을 표현하고 정리하는 법, 져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 이기는 건 힘이 든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도 우리 반 아이들과 같은 색깔과 디자인의 반티가 돌아다닙니다. 업체마다 여러 사이트 동시에 상품을 올리고 대표 아이들이 선택하는 식이라 우연히 겹칠 수 있지요. 입어야 하는 날이 다르고, 돌아다니는 공간이 달라 서로 모를 뿐. 그래서 대표 아이들이 하는 역할 중 중요한 게 같은 학교 안에서 겹치지 않게 인스타나 페북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일단 공유하는 절차입니다. 


반티는 교복(school uniform)하고는 다릅니다. 스스로가 정한 겁니다. 물론 주도적인 학생들이 회의에 부쳐 다수결로 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만. 옆 반하고도 다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날만큼은 자스민이 될 수도, 유명한 선수가 될 수도, 소방관이 될 수도 있지요. 자신의 욕망의 색깔을 마음껏 표현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맛보지 못하는 해방감입니다. 


엊그제 평소 말없고, 대면대면하던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한 팀이 되어 준우승을 했습니다. 상금 10만 원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하는 아이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겠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아직은 기울어지지 않은 공정한 운동장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하루 종일 꿈꾸었으니까요. 가르치는 사람이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응원을 보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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