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감탄寫] 25
시술 의자가 세 개 있고, 커다란 거울 세 개, 조금 오래된 듯한 검은색 소파 하나, 더 오래된 듯 색이 노랗게 바랜 정수기 하나, 머리 감는 곳 정도. 인테리어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곳입니다. 흔한 스피커 하나도 없이, 음악을 자기 폰으로 틀어 놔요.
어느 날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보니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이 머리를 하고 나서 나가면서 다음 달 예약을 하는 식이었습니다. 인터넷 예약, 전화 예약이 되질 않습니다. 매장을 방문해 사장님의 동의를 얻어 손님이 기록해야 합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탁상용 달력에 자기 폰 번호를 직접. 완전 수동이지요.
비용 대비 각자의 목적이 잘 달성되니 이런 불편함에도 손님들이 많은 거겠죠. 그런데 그 원초적인 이유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지 싶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처음 커트를 하러 간 날. 커트한 시간은 20분 남짓인데, 사장님이 직접 해주시는 샴푸 시간만 10분이 넘게 걸렸다는 점이 지난 일년의 시작이었죠.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힐링이었습니다. 퇴근 후에 가서 몽롱하게 앉아 있는데, 온몸을 구석구석 마사지 해주는 것 같았죠. 정성을 넘어선 진심이 느껴졌어요. 사람이 느껴졌어요. 아, 이분 자기 기술로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는구나, 싶었습니다.
상냥하고 웃는 표정이 굳은 저의 얼굴 표정을 실룩거리게 만드는 것은 기본입니다. 게다가 손님의 스타일에 따라 응대하는 눈빛, 조용조용 차분한 말투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말을 전혀 걸지 않지만, 겁니다. 수다스럽지 않지만, 말이 많아요. 하지만 사회적 친화력을 만들어서 내 집 손님으로 만들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없어요.
그런데도 자그마한 달력에는 다시 오겠다는 사람들이 빼곡합니다. 매번, 두어달 뒤까지 달력에는 여백이 거의 없습니다. 앉아서 기다리면서 생각합니다. 이 사장님 책 읽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겠다 싶어져요. 한 달에 한 번도 정해놓고 쉬지 않으신다고 하신걸 보면요. 그런데 제 눈에는 거대한 철학자로 보입니다.
잘 챙겨 먹고 나서도 그냥 맥이 쭈욱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혼자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무엇인가 꽉 차 있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요. 마음의 여백을 찾고 싶어집니다. 물론 그 종류와 정도는 다 다르죠. 그 다른 점을 이 사장님은 찾아내는 게 분명합니다. 여백 없이 빼곡한 달력에 들어 찬 손님들이 원하는 여백을.
자는 것도 아니고 안 자는 것도 아닌 날이 있습니다. 노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닌 때가 있습니다. 여백이 몽땅 사라지는 것 같은 불쾌하게 가득한 날도 있죠. 이런 날엔 머리를 하면 참 좋겠습니다. 머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요.
물론 여백이 그리울때마다 머리를 하러 갈 수는 없지요. 대신 이 사장님의 뒷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기술로 누구의 마음을 사고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 여백이 되고는 있을지 더듬거려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짐하게 됩니다. 빈 틈이 많은 사람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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