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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꽃 아래서도 쭈글해질 거야?

[ 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 11

by 정원에 Feb 18. 2025

입춘을 전후로 대지의 온기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이러다 봄이 어느새 낮잠 한숨 자고 나면 옆에 와 있을지 모르겠네요. 강아지와 자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때면 집에 하루 종일 있어도 얘가 응가를 하지 않을 때가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 쌀쌀한 날씨에도 강아지와 산책을 나서야 합니다. 얇은 면 장갑을 끼고서요.


산책 중에 다행히 응가를 하면 목줄에 달려 있는 비닐 배변 봉투통에서 롤을 잡아당겨 한 칸을 뜯어내 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손가락 온기가 없는 장갑이 계속 미끄러워 비닐봉지 입구가 좀처럼 벌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얼른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하면 금방 해결될 텐데, 손이 시려서, 귀찮아서 계속 장갑 낀 손으로 어떻게든 벌려보려고 애씁니다.


속으로 '아 C, 벌려져라, 벌려져라...' 하는 동안, 자기 응가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는 강아지를 팽팽하게 잡고 있으면서도, 그걸 그렇게 매번 반복하네요. 문제는 배변봉투에만 감정이 굴복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빳빳한 종이짝보다도 못하게 쉽게 구겨지는 마음이 무척이나 어른스럽지 못할 때가 자주입니다.    



외출 준비 다 하고 나왔는데 볼 일이 급하면, 

붕어빵은 먹고 싶은데 차에서 내리기 싫으면, 

티셔츠 택이 턱밑에 와 있는데 그냥 입고 나가면, 

지하주차장까지 왔는데 차키를 두고 내려왔으면, 

하기는 싫은데 해야 하니  작년처럼 하고 넘어가면,  

양치하고 불 끄고 막 누웠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침대에 누워 이불 덮고 몸 돌렸는데 불 끄는 걸 까먹었으면, 

보고는 싶은데 나가기 싫다 하니 정말로 몸이 통증을 만들면,

자려고 누웠을 때 침대 아래로 충전기 줄이 툭 떨어져 들어가면, 

지하 주차장 저 안쪽에 주차하고 동 앞 자동문까지 왔는데 전화 오면,

껍질 까는 게 번거로워 새우하고 게는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되었다면,

따듯한 이불속에 쏙 들어가 이불을 돌돌 말았는데 양말을 안 벗었으면, 

운동 가려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을 때 이어폰을 놓고 나왔다면, 



브런치 글 이미지 1

번거로움에 자주 굴복하는 마음은 옹졸해집니다. 마음이 그런 건 영혼이 쭈글 해져서 이겠다 싶어 집니다. 결국은 맨손으로 배변봉투를 열어 처리한 뒤 강아지와 신호등을 기다리는 데 저 맞은편 기둥에 날씬한 차양막이 가지런히 묶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건너면서 다가가 보니 봄이 대롱대롱 걸려 있더군요. 아, 이러다 곧 꽃 세상에 다시 파묻히겠구나 싶어 지니 쭈글 해진 마음이 조금 펴지는 듯합니다.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송편을 한 입 베어 문 듯 마음이 달짝지근해졌습니다. 


멀리서 저를 기다리는 다급한 표정의 강아지는 잠깐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꽃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맞아요. 꽃들도 일 년 내내 자기 계절을 준비하며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으고 있을 겁니다. 땅에서, 하늘에서, 바람에서, 햇살에서 그리고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발자국에서.


일기예보에서 '오늘부터 봄!' 한다고 해서 꽃잎이 휘리릭 펼쳐지는 게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번거로워하는 하찮은 것들'에 파묻혀 잊고 있었네요. 그런데요. 우리가 봄이라, 여름이라 꽃에 취해 있는 동안 가만히 보면 꽃은 금방 지고, 피는 이어 달리기를 합니다. 그렇게 일 년 내내 준비했던 것들을.


봄 하면 떠오르는 벚꽃, 개나리, 진달래, 유채꽃, 철쭉은 며칠을 주기로 서로 꽃을 피웁니다. 온 세상이 자신들에게 달려들어 찍고, 맡고, 웃죠. 하지만 꽃의 입장에서 보면 일 년 48주 중에 대략 1~2주입니다. 꽃이 꽃으로 살 수 있는 기간이 말입니다. 따님이 좋아하는 능소화도 고작 한여름 가운데서 2주 정도 피었다 이내 떨어집니다.


가을꽃은 어떨까요? 해바라기도, 코스모스, 국화도 길어야 한 달 남짓이죠. 그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장미 정도죠. 봄장미, 여름장미, 가을장미 거기다가 1년 내내 꽃이 피는 사계절 장미 품종도 있는 것을 보면요. 그 덕에 작가에게 눈에 자주 띄어 오랜 전부터 여기저기에서 자연을, 인간을 은유하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기억한정이고, 독서가 부족해서 그런지 철쭉이나 개나리, 히아신스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반면 장미가 등장하는 작품 중에 어른이 되어 두고두고 읽게 되는 거의 유일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 왕자>입니다. 사실, 어린 시절 접한 <어린 왕자>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바오바브' 나무를 궁금해했던 건 분명합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서 유독 장미의 가시가 가슴에 와 박혔습니다.   


그나마 가장 오래 볼 수 있는 장미는 마치 번거로움, 게으름, 귀찮음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을 꾸역꾸역 숨기느라 화려한 가시를 달고 사는 게 꼭 저 같아요. 그런 '약한 모습'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 같아요. 넘어가지도 않고, 다시 넘어오지도 않으면서 계속 콕콕 찌르는 게. <어린 왕자>에서 내보이고 싶지 않은 가시를 '장미꽃’에 비유합니다.



“꽃들은 연약해. 순진하고. 꽃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거야. 가시가 있으면 무서운 존재가 되는 줄로 믿는 거야…….”*

*생텍쥐페리,어린왕자,2015,열린책들



연약함을 애써 숨긴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시는 어쩌면, 그 연약함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방어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기회를 줍니다. 꽃들이 짧은 생을 다하고 지더라도, 이어지는 꽃들이 계속해서 피어나듯이 말이죠. 우리는 그저 번거로워 보이는 과정에 휩쓸려, 이 기적 같은 순환을 종종 잊고 사는 것뿐입니다.


꽃의 입장에서만 보면 얼마나 '번거로운 짓'일까요? 


땅속에 파묻혀 자신을 당겨줄 뿌리를 탐색하고, 거미줄 같은 뿌리하나 얻어 타고 수개월을  중력을 거슬러 올라와, 하나라도 더 태어나려고 아등바등거리며 줄기를 선택하고, 줄기 마디마디에서 좋은 자리 잡으려고 꽃눈을 달고 또 달고, 꽃가루로 씨앗으로 우주의 에너지를 담고 담아 저장하고, 아주 찰나적으로 꽃잎을 피어낸 뒤 세상에 향기만을 남겨 놓은 채, 열매에게 생을 물려주고, 잠깐의 비행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를 매번 반복하는....


말할 수 있는 꽃이 있다면, 말을 걸면 분명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어요. "말도 마요. 말도 마. 그 며칠을 보고 온 일 년을 마치는데, 번거롭기 그지없지요. 게다가 비바람이라도 갑자기 불면... 일 년 세월 다 망쳐요 망처.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죠. 내년을 또 준비하는 수밖에요!"  


자연이 보내 준 꽃한테 배워야 할 게 참 많습니다. 한두 도시, 서너 동네에서 내 삶의 거의 전부를 살면서 온 세상을 다 살아본 듯 사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작은 일상의 번거로움을 너무 쉽게 불평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게 됩니다.


곧 다시 찾아와 줄 고마운 봄. 가득한 꽃을 보며 예뻐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수고로움에 경의를 표해야겠습니다. 저의 가시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봐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탁월한 성품이라고 한 '온화함'**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사계절 내내.

**크리스타 K 토마스, 악마와 함께 춤을, 2025,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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