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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 리모델링을 위하여

[ 아빠의 유산 ] 17

by 정원에 Mar 16. 2025

기억하니? 우리 가족 제주도 여행 갔을 때 그 지/렁/이. 언젠가 여행 다녔던 곳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너희 둘 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로 꼽은 곳이었던 곳. 한라산 산굼부리 오름, 이 아니라 그 분화구 옆 벌건 땅을 둘이 파헤치다 발견했던 손가락 만한 지렁이를 말이야.  


하니가 손가락을 들어 올린 지렁이에 비니가 기겁을 하면서 비껴서 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 물론 그때 아빠는 산굼부리 분화구를 카메라에 담으려 열중하느라 같이 땅을 파헤치지는 못했었지만. 


아빠가 너희들에게 '아빠의 유산'을 쓴 게 벌써 열일곱 번째구나. 그런데도 여전히 아빠의 편지는 재미가 없지? 괜찮다. 나도 잘 안다. 내가 아빠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거든. 


내가 너희였고,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이런 편지를 써주셨더라도 와~ 하면서 읽지는 못했을 거거든. 왜 그럴까 하고 요즘 돌아보는 중이야. 아빠가 너희들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하물며 '놀이'인데도 말이야.  


그렇게 반성하다 보니 한 이야기가 떠올라. 대장 내시경 실험 이야기지. 한 심리학자가 두 그룹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어. 두 그룹 모두 대장내시경 검사를 실제로 받는 건데, 다른 점은 모든 검사가 끝난 이후에 있었어. 


한 그룹은 검사가 끝나자마자 호스를 항문에서 바로 제거하고, 다른 그룹은 5분 정도를 그대로 기다린 후 호스를 제거하는 거였지. 이후 질문지에서 '당신의 건강을 위해 지금과 같은 방식의 (고통이 따르는) 검사를 다음에도 스스로 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을 두 그룹 모두에게 던졌어. 이게 실험의 본질이었지. 


이 질문에 어느 그룹이 더 긍정적인 반응을 했을 것 같아? 아빠는 당연히 호스를 바로 제거한 그룹이라고 직관적으로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단다. 5분 정도 호스를 그대로 두었다가 제거한 그룹에서 '할 의사가 있다'는 비율이 두 배나 넘게 높게 나왔던 거야. 


그런데 그 이유가 아주 신선했어. '고통에 대한 최종 경험'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다음 반응이 달라진다는 거였어. 검사 내내 고통이 있었던 검사였지만 5분여 동안 고통이 제거된 경험에 대한 기억 여부가 결론의 차이였던 것이지. 


이런 면에서 보면 아빠는 '재미있는 놀이'에 대한 경험이 어른이 되고 나서는 거의 없었던 거야. 마치 놀이조차도 대장 내시경 검사를 하듯 한 건 아닌가 하고.  


운동도 건강해지려고 억지로 해야 했고,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일'에 밀려 좋아했었나 싶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지. 온 감각을 동원해서 지렁이를 만난 너희들의 기억과 같은 경험이 어른이 되고서는 (거의) 없었던 것이지. 


'재미'라는 게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주1)이 일어나는 상태이고, '영양분이 많고 맛도 좋음. 또는 그런 음식'이라는 한자어 '자미(滋味)'(주2)인데 일과 놀이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아왔으니 당연한 결과겠다 싶어 지네.   

주1, 주2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stdict.korean.go.kr/main/main.do)



지난번 편지에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놀이터라고 했잖아? 바로 그 놀이터가 궁극적으로는 '잘 노는'것을 실험하는 실험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로우가 이야기했던 크고 작은 '실험'이 계속 이어지는 실험실. 



19세기 미국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45년 7월 4일 월든 호수 근처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404 그는 직접 지하실을 파 고 오래된 목재를 사용해 집을 짓고 나무를 베어 가구를 만들었다. 사냥과 낚시를 하고 콩과 옥수수, 완두콩, 순무, 감자를 심어 정원을 가꿨다. 인근 마을인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사회생활을 이어가긴 했지만 이후 2년을 대부분 숲에서 보냈다. 소로는 월든 호수에서 보낸 시간을 '실험'이라고 불렀다.(주3)

주3 > 크리스타 K.토마스, 악마와 함께 춤을, 2025, 흐름출판, p.260 

 


평생 '음식 맛'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일에서, 일상에서, 나 자신에게서 자미한 요소들을 찾아 즐기는 행위에서 얻는 절정의 경지.  '도취'의 경험에 대한 실험을 시도할 실험실을 리모델링해야겠다. 


'도취'는 철학자 니체가 이야기한 최고의 놀이라고 칭송했던 현대 예술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란다. 플라톤이 인간을 비이성적인 상태로 만드는 부정적인 정서로 봤던 것을 니체는 정반대로 해석해. 


단순한 쾌락이 아니고 '삶의 고통을 긍정하고 의미를 창조하는 적극적인 행위'로 보는 것이지. 아빠는 플라톤보다 니체의 의견에 적극 동의한단다. 아빠만 보더라도 도취를 '자아도취'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 놀고 있는, 건강하게 놀고 있는, 자기 일에 사명을 가지고 순수하게 도전하는 그 과정 자체가 '제대로 푹 빠져 열중하고'있는 상태잖니? 그 상태가 바로 도취란다. 그런데 놀이도, 일도, 그 무엇도 그 상태까지 가보지 못한, 최종 경험이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라 부정적으로 흐르는 것이지. 


또, '리모델링이라고 한 이유는 아빠는 이미 놀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 놀이터 자체가 실험실이라는 의미야. 하지만, 방금 이야기 한 이유로 출입문도 다 떨어져 나가고, 실험실 내부에 있는 실험 기구들도 망가졌고,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는 상태거든. 


그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실험실 리모델링인 것이란다. 이 말은 지금부터라도, 아빠부터라도 '재미있게' 놀아 보는 경험을 많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 잘 노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잘 노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잘 알려주는 게 없을 테니까 말이야. 




잘 놀고 있다

잘 놀았다 

잘 놀다 간다

잘 놀다 죽은 사람이 때깔도 곱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출입문을 잘 정비해야 할 것 같아. 실험실 문은 아빠의 일상에서 도취 on/off라는 신호를 보내줄 수 있는 시그널을 의미해. 아빠가 앞에만 서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투명 자동문으로. 


자동문은 센서로 작동하잖아? 출입문을 자동문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아빠의 심리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란다. 일상 공간과 도취 공간을 스스로 물리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시도이지. 출입문 자체가 실험이지. 


지금껏 읽지 못했거나, 않았던 분야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게 출입문 정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on/off가 원활하게 잘 되는 센서를 장착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센서가 고장 날 것에 대비한 예비 센서들도 가득 챙겨두는 것이니까. 




그다음으로는 필요한 실험 기구들을 잘 살펴봐야겠어. 아빠한테 잘 맞는 실험 기구들이 무엇이 있을까, 요즘에는 어떤 실험 기구들이 유통되고, 소비되고, 궁극적으로 창조의 행위에 도움이 되는지를 말이야. 이 부분이 '잘 놀기'위해서는 가장 중요할 것 같아. 


그런데 솔직히 이 부분이 아직은 숙제야. 지금껏 전혀 다뤄보지 못한 실험 기구들도 있고, 어떤 실험 기구가 존재하는지 자체도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 못하거든. 지금 아빠한테 떠오르는 것들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삶을 즐기기 위해 필요하다고 언급한 '아름다운 것'들.  



자연, 음악, 미술, 언어, 연극, 영상 ..... 그리고 사람  




마지막으로 켜켜이 쌓인 먼지들을 다 떨어내야겠지. 정기적인 대청소를 자주 하는 거야. 그래야 공간 최적화가 가능하지. 실험실의 본질은 실험인데, 실험에 필요 없는 것들이 실험실 안에 방치되어 있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실험실의 '환기'가 중요하지. 이런 환기 시스템을 활용해서 자신의 재미, 놀이, 도취의 실험실에 먼지가 쌓일 틈이 없이 잘 유지하는 사람들을 살펴봐야겠어. 사람은 사람한테 배우는 게 제일 빠르거든. 사람의 미래는 사람이니까.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플라톤, 니체 .... 

그리고 잘 놀고 있는 사람들




갑자기 지렁이를 만났을 때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면서 그 순간의 놀람과 기쁨을 온몸으로, 눈으로, 표정으로, 함성으로 표현했던 너희들의 그때의 상태. 그 상태에 자주 빠져 들 수 있는 실험들을 시도해 나가려고 해. 


음, 지금 당장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나? 

일단, 실험실 앞으로 가봐야겠군!!


https://blog.naver.com/ji_da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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