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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바닥을 고백해!

[ 아빠의 유산 ] 18

by 정원에 Mar 23. 2025

어제 우리 한참 통화를 했었잖아. 그때는 오전 6시부터 2시간 넘게 있었던 줌(zoom) 미팅이 막 끝난 후였단다. <엄마, 아빠의 유산> 팀에서 글을 쓰기로 해 자발적으로 모인 스무 명 넘는 작가들과의 미팅이었지.


이제 정식 계약서를 쓰고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 할 시점이란다. 그런데 말이야. 고백할 게 있어. 아빠와 필명이 같은 리더께서 이런 말을 던지셨어. 마지막에, 단호하게!     


‘못할 것 같으면 지금 빠지십시오!’     


'지금 빠지십시오.', '지금 빠지십시오.'. '지금 빠지십시오.'.... 화면 안에서 다른 이야기들이 이어졌지만, 아빠한테는 이 말이 계속 맴돌았다. 하니와 한참 통화를 하고 낮동안 조심조심 출장을 다녀오는 내내 그랬지.


아빠는 무언가 한번 시작을 하면 슬쩍 그만두는 법이 없는 사람, 이라고 너희가 말을 자주 했었지. 아빠 스스로도 그런 사람으로 알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었고. 그런데 말이야. 어제는 정말 '빠질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정, 체면, 관계 뭐 이런 거 못 본 척하고 뒤돌아 서고 싶었어. 찌질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스스로가 먼저 인정하지 못했어. 그런데 그때 아빠를 지배했던 건 분명 기분 나쁘고,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이었어.


'놀이'를 주제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왜 그랬을까를 하루 종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늘 이 글을 발행해야만 하는데, 한 글자도 쓰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어.


그러다 통화 속에서 하니가 했던 그 말, 그 말이 아빠 머리를 강력하게 휘갈겨 버렸어. 머리가 어질 할 정도로. 고졸 검정고시 출신인 네가 이제 막 한 달을 넘기고 있는 영어 수업을 따라 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네 담당 교사의 이 말에 너무 크게 위로가 되었다고!



"나는 네가 매일매일 새로운 실패를 경험했으면 좋겠어!'

'그런 후 했던 실패는 다시 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어!'




아! 맞아. 일상이란 '놀이', 인생이란 '놀이터', 책 읽기와 글쓰기란 '놀잇감'을 대하는 아빠의 태도가 문제였구나, 하는 생각이 마구 솟구쳐 오르더구나. 아빠는 아빠의 놀이를, 나만의 놀이터, 내가 가장 애착하는 놀잇감을 가지고 놀 때에도 언제나 '잘' 놀아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생각에 휩쓸려 있는 것 같아.


나는 항상 잘해 왔으니까, 놀 때도 잘 놀아야 하고, 문제없이 잘 노는 모습을 언제나 보여주여야 한다고. 내가 진심으로 놀아보는 게 아니라, 내가 노는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나는 누구보다 더 잘 놀까를 여전히 염두에 두고 '노는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래. 맞아. 언제나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아빠'란 역할에 대한 강박적 주문을 갖고 있으면서도 잘 '노는 척' 하고 있고, 언제나 실수 없이, 빈틈없이 선한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교사'란 직업적 체면을 우선하면서도 꽤나 '아닌 척'하고 있는 거지.


나에게 어느 누구도 책과 글을 놀잇감으로 가지고 놀아 보라고, 야근 후에 늦게 잠들었는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라고 강요한 그 누구도 없는 데 말이야. 공개적으로 글을 쓴 게 벌써 3년 하고도 5개월이 넘어간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 지는 26개월째.


그런데 이 기간이, 시간의 총합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문득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갈수록 글이 안 써지는 이유와 함께. 700개를 하나 남겨 놓은 지금. 글 속에서 나는 무엇이었나, 누구였나, 어떤 것을 쓰려했나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되질 못했나 보다.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면서 아빠 안을 계속 들여다봤지.  그러다 하니 너와 통화를 한참 하게 되었던 거야. 글을 도구로 놀아보겠다고 하고선 처음으로 마주하는 아빠의 바닥의 모습인 것 같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가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았던 놀이가 '나이 먹기'였단다. 장소가 어디던 관계없이 전봇대 같은 기둥 두 개만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공간이면 가능했던 놀이였어. 아니, 기둥으로 쓸 개 없으면 그냥 남의 집 담벼락도 괜찮았어. 동그랗게 원 하나면 벽에 그려 놓으면 되었거든.


 팀을 나눠. 그리고는 상대팀의 전봇대(기둥, 담벼락 원)를 향해 무조건 달려가는 거야. 골목, 광장으로 이어지는 구석구석을 두 발로 땅바닥을 뛰어다니면서. 상대팀이 전봇대를 비운 사이 아빠 손바닥으로 '원 없이' 손바닥을 두드리면 끝이야.


'하나, 둘, 셋, 넷....'   두드린 만큼 나이를 먹는 거였어. 그러면 나이를 더 많이 먹은 사람이 적게 먹은 사람을 붙잡고 데리고 다닐 수 있었지. 이야기를 하면서 보니까 어느 팀이 총합의 나이가 더 많은가를 겨루는, 어찌 보면 심심하고, 싱거운 놀이였구나.


그런데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그 놀이에만, 놀이 자체에만 몰입했던 놀이였단다. 왜 그랬을까. 왜 그게 가능했을까를 어제 내내 생각해 봤어. 지금껏 찾아낸 그 근거에는 오로지 단 하나.



바닥



지금도 '나이 먹기' 놀이를 할 때의 공동 수돗가 공터가 떠올라. 친구들의 얼굴, 소리가 느껴져. 맞아. 바로 열정적인 놀이는 바닥에 집중할 때 최고였던 거야. 제대로 된 놀이터는 바닥이 가장 중요했던 거야. 바닥이 튼튼하고 안전할수록 다양한 놀이 기구를 설치할 수 있고, 해체할 수 있는 거였지.



습도가 너무 말라도, 너무 젖어도 안되고,

크기가 너무 좁아도, 너무 넓어도 안되고

탄성이 너무 부드러워도, 너무 딱딱해도 안되고,

흙 입자가 너무 미끄러워도, 너무 거칠어도 안 되는!



여전히 제대로 놀고 싶은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바닥의 중요성을 잃고, 놀이기구 자체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 이제는 바닥 정도는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이었고, 바닥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 상태로 당연해야 한다는 욕심이었지.


그렇게 한참을 놀지 않고 노는 척만 하느라 내 안에 제대로 갇혀 버렸다. 마치, 직접 출입구를 파고, 통로를 뚫고, 통로끼리 연결하고는 다시 출입구를 찾지 못하고 말아 버린 일개미처럼.     


개미가 굴을 파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만의 바닥을 근거로 살기 위해서다. 바닥에서 잘 살기 위해서. 아빠가 글을 쓰고 싶(었)고, 새벽에 일어나고 싶(었)고, 지금껏 그러는 이유도 개미와 마찬가지일 텐데. 개미굴이 개미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몇 주 전에 그동안 아빠가 읽고 기록해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아주 어이없는 실수로 지워 버렸어. 영구 삭제가 되었더군. 그 이후 몇 주간 허탈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분명해. '매일 새로운 실패'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신나는 시도를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지.


그래서 지금 이 글은 자기혐오에 대한 글이 아니야. 이제라도 제대로 읽는 나, 글 쓰는 나, 제대로 노는 아빠를 다짐하는 각오의 글이란다. 바닥을 느꼈으니, 점프할 일만 남은 거란 다짐 말이야. 막힌 것도 나, 막은 것도 나, 뚫어야 하는 주체도 나이기 때문에.     


그래 맞아. 제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놀다 보면 때로는 힘들지만, 지치지는 않지. 고통이 따르지만, 짜증이 나지는 않아. 실패여도 열패감이 올라오지는 않고. 그게 진정한 놀이였는데, 그 바닥 정신을 아빠가 잊고 살았구나.


그냥 놀면 되었는데 잘 노는 모습을 '보여주려'하는데 열중했던 거였어. 그냥 내가 날 데리고 놀면 되는데. 그렇게 노는 게 바닥을 더욱 튼튼하게,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다 '어떻게' 놀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건데. 그러면 되는데.


이제부터라도 다시, 바닥 공사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바닥 공사라는 것도 사실 별 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금 아빠에게 필요한 바닥 공사에 대해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수천 년 전에 이미 이야기했었거든.



우리는 철학하는 체해서는 안 되고, 진정으로 철학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_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 쾌락, 2022, 현대지성, p. 146



https://blog.naver.com/ji_da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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