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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림

[ 언어와 나의 세계 ] 77

by 정원에

하나, 둘, 셋 할 때까지는 아직 사진이 아니다. 세상 그대로다.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하나’는 너무 짧고 ‘다섯’은 너무 길다.


하지만 ‘찰칵’하는 극도의 찰나에 기억하고 싶은 세상이 순간 ‘박제’된다. ‘찰칵’은 생명이 가장 빛나던 어느 한순간을 영원히 고정하기 위해 삶이란 묵은지에서 정확히 그 부위의 단면만을 떠내는 ‘칼질’이다.


사진을 찍을 때나 찍힐 때 숨을 멈추는 이유는 이 ‘칼질’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이다. 그래야 ‘흐르는 시간’에서 남기고 싶은 순간을 제대로 잘라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그림은 하나, 둘, 셋도 없고, 찰칵도 없지만 사진에는 없는 숨이 가득하다.


왜냐하면 시간의 순간을 박제하는 게 아니라, 시간 자체를 ‘발효’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직접 그린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때, 그곳의 향이 느껴지는 이유다.

그림은 순간을 잘라내지 않는다. 시간을 캔버스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그리는 이의 수많은 들숨과 날숨 사이를 채운 붓질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이미지로 담근다.

1시간 동안 담근 그림에는 1시간의 시간이, 1년 동안 담근 그림에는 1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발효되고 숙성된다.


사진과 그림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모두 ‘시간’을 붙잡으려는 시도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지울지를 고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사진은 순간을 베어내는 '칼질'로 시간을 붙잡고, 그림은 시간을 품어 숙성시키는 '담금'으로 시간을 붙든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달라도, 끝내 붙잡고 싶은 진실을 망각의 언덕 위에 남기려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하나이다.


그렇게 이 둘은 순간의 강렬함만으로는 삶이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다. ‘시간’을 들여 견디고 머물고 겹겹이 쌓이는 과정이 삶을 깊게 만든다는 사실, 즉 깊이는 지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간 스스로가 이미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 한다.


오늘도

무엇을 찍고, 그려

나의 삶 속 필름에, 화실에 남길지는

오로지 나 스스로의 선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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