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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시간

[ 언어와 나의 세계 ] 76

by 정원에


우리가 말속에서 사용하는 ‘어휘’는

서로에 대한 이해, 문제 해결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지도와 같다.

지도는 실제 그 장소, 즉 본질이 아니라, 그곳을 가리키는 도구이고 규칙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갈등 상황에서 ‘지도’ 자체를 가지고 다툰다.

‘당신 지도에 그어진 이 시그널이 틀렸어!’

‘왜 내 지도를 그렇게 함부로 해석하지?’

‘내가 가진 지도가 훨씬 더 정확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


그렇게 말꼬리를 잡으면서 어휘 다툼을 하는 동안, 정작 우리가 함께 가려 했던

상대를 향한 축복,

관계를 위한 회복,

서로를 더한 행복,


이라는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잊어버린다.


결국,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지도만 남고, 우리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다. 물론 그동안 삶이라는 개울물은 끊임없이 바다로 들어가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매일 아침 정확한 액수를 모른 채 주어지는 ‘동전 주머니’와 같다.


이 동전은 유일한 화폐이며, 한 번 쓰면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다. 잠을 자는 순간에도 그 주머니 속 동전은 계속 줄어든다.


이 동전은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고, 손을 잡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나를 성장시키는 ‘가치 있는 경험’을 사는 데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귀중한 동전을 ‘지도 싸움’에 탕진하기 일쑤다.


상대방의 지도가 얼마나 틀렸는지 증명하기 위해, 내 지도가 얼마나 정확한지 알아주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기 위해, 나에게 독한 것을 집어넣어 더 독해지기 위해!

자신의 지도를 좀 더 정밀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방법도

자신의 동전을 적게 사용하고 반짝이게 지키는 방법도 한 가지다.


그건, 우선 자신의 어휘를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는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삶에서 맞닥뜨리는 진짜 갈등은 ‘너와 나의 다름’이 아니라, ‘무한히 살 것처럼’ 사소한 어휘 싸움에 매달리는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절한 어휘를 못 찾겠으면 차라리 깊게 침묵하는 게 낫다.

침묵은

싸움의 대상인 지도가 ‘가짜’ 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나의 동전 주머니를 열지 않고 꽉 쥐는 결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침묵은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버려지는 시간은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의 ‘어휘’이며,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엄마의 젖꼭지를 물면서, 울음을 그치면서 배웠던 '최초'의 어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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