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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25. 2023

미끼 조끼

지난 토요일 오후. 아내와 단 둘이 근처 재래시장으로 장을 보러 나갔다. 자동차로 삼십분쯤 떨어진 곳. 장도 보고, 봄도 구경하고, 그리고 맛있는 커피도 한 잔 할 목적으로. 그런 날은 나와 아내는 고속도로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쓱 하고 달려가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말고, 큰 도로 말고, 외곽도로. 뒷길, 옛길로만 찾아서 달린다. 천천히, 천천히.


그러다 멀찍이서 부터 로고가 선명한 노란 주유소가 눈에 들어왔다. 햇빛에 바사삭 눈부시게 간판에서 반짝거리는 느낌이 오래된 주유소들 사이에서 새로 등장한 개업 주유소였다. 하지만 더 쑤욱 하고 빨려드러가듯 한 더 큰 이유는 단연 기름값. 물론 그 국도길에는 꽤 저렴한 주유소들이 많지만 경유가 1423원이었다. 어제 퇴근길에 자주 하던 파란 주유소는 1460이었는데. 심지어 아내 직장에 가는 길에서 자주 이용하던 빨간 주유소보다 더 저렴했다. 아, 개업'빨' 이구나 싶었다.


주유소는 한적 했다. 오만 몇천원을 주유하고 나니 셀프 주유기 액정에 영수증 출력을 묻는 화면이 나타났다. 그런데 다른 주유기에서는 잘 못보던 선택 버튼이 나타났다. '세차권 출력'. 보통 영수증이 출력되고 거기에 세차권이 따라나오던 방식인데 요즘에는 그 세차권마져 대부분 사라졌다. 이천원 하던 세차가 지금은 오천원. 하부, 거품 추가 추가 하면 육천원, 칠천원으로 후딱 넘어간다. 지지난 주 출근길 안개 지옥이었던 날 전 날. 한 반나절 후두둑 떨어진 흙비에 하얀색 차가 온통 옅은 흙색 달마시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세차권 출력 버튼을 눌렀다.  


아 근데, 이게 횡재. 5만원 이상 주유면 무료 세차라고? 무려 무료? 나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 몇백원, 몇천원 아껴지는 게 그리 좋다. 그렇게 기분 좋게 차를 목욕 시킨 뒤, 주유소 뒤쪽 공터에서 차 안 먼지도 빨아 내고 날리고. 처음으로 아내가 나서서 내부 청소를 하는 동안 나는 타이어 공기를 채웠다. 햇살 넘치는 토요일 오후. 처음 들른 주유소는 줄 설 요량으로 가다 참지 못해 우연히 먼저 들른 식당이 최강 맛집이 되는 것같은 기분좋이었다.  어디라도 단박에 휙 날아갈 수 있는 살짝 설레이는 마음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분명 아내의 표정도 그렇게 읽혔다. 이런 날은 가끔 자신에게 상대에게 아주 아주 관대해지는 날이 된다. 그런 기대가 된다.


손가락을 핸들위에서 톡톡 팅기면서 좋은 기분으로 목적지 시장에 도착했다. 해산물에 봄나물에 사람이 넘쳐 났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미로 게임하듯이 사사삭 지나다녀야 했지만, 부딪힐 정도는 아니어서 괜히 기분이 가벼웠다. 그렇게 수산물, 과일 가게, 떡집, 쌀가게, 참기름 짜는 집, 새우 튀김집을 잘 지나치다 멈칫. 바로 가끔 들르는 커피집 옆 옷가게. 예전에 따님과 같이 왔을 때 잠옷을 하나 샀던 그 곳. 아이쇼핑을 시작하는 듯 한 아내를 잠시 보다 톡을 확인하다 다시 고개 들어 보니, 시장통에서 아내가 사라졌다. 몇 발짝을 옮겨 옷가게 안쪽으로 들여다 보았다.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아내는 서서히, 서서히 가게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자주 나에게 그런다. '자기는 남자치고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야. 그래서 아주 좋아. 좋아'라고. 그렇다. 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쇼핑을 하면서 나는 인내심과 체력을 테스트하는 걸 좋아한다. 일주일 내내 달리고 맞는 주말.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쓰면서 정리를 할 수 있으니까. 글에서 다짐을, 나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가는 건 더 좋아한다. 나간다는 건 여러 가지 조건이 딱 들어 맞아야 하는 거다. 몸 상태도, 움직일 때 필요한 탈것도, 예산도 그리고 마음에서 출발한 기분도 모두 정상이 상태여야 가능하기 때문에. 


옷가게는 안쪽으로 깊숙한 구조였다. 시장 통행로 언저리까지 진열된 옷걸이에서 하나 둘 옷들을 만저보고, 입어보는 아내. 나는 그 뒤를 엄마 잃을 것 같은 아이마냥 졸졸 따라 다녔다. 그렇게 나보다 조금 더 쇼핑을 좋아하는 아내와 더 더 좋아하는 따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방모찌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운동 대신 걷기를 한다는 위로를 스스로 하면서. 어떤 날은 몇백보에서 출발해서 1만 2천보를 찍고 들어온 날도 있다. 그렇게 오늘의 운동량을 채우는 방식을 좋아라 한다. 일석이조니까. 아내가 힐링되고, 나도 운동하고. 


그러다 아내는 12,000이라고 써 진 옷걸이 라인에서 보라색 조끼를 하나 발견했다. 아내는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항상 나를 부른다. 그리고 나에게 허락, 아니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항상 묻는다. '어때?' 하고. 에전에는 다 좋다고 했지만, 지금은 팩트를 말해 준다. 그래서 아내가 요즘에 더 자주 묻는다. 물론 어떨때는 서너번 반복해서 묻는다. 다른 옷으로 갔다가 다시 와서 그 옷을 또 만지면서 묻는다. 그 정도되면 내가 '안어울려'해도 산다. 그 보라색 조끼는 정말 잘 어울렸다. 원래 보라색이 잘 어울리는 아내다. 나의 엄지척을 본 뒤 장난감을 득템한 아이처럼 새하얀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키가 큰 여사장님은 가게 저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하루에서 우리 부부를 행인1, 행인2 정도로 여기는 모양새였다. 가끔 우리를 돌아다 볼 뿐 옆에 앉은 지인인 듯한 이와 수다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으래 '다음에 올께요'하고 지나칠 줄 알고는 지금은 파는 것보다 수다떠는 데 더 신난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프로는 다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옷가게 안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듯 했다. 지인한테 왼손바닥을 펼쳐 '잠깐'이라고 하듯 말없이 신호를 준 뒤, 아내에게 다가왔다.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이미 우리 부부를 간파(?)한 느낌으로. 그런데 아까부터 그 여사장님이 낯이 익다라는 생각을 혼자 계속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내를 전담마크하듯 다음 옷, 다음 옷을 대기하는 민첩성과 지구력을 보였다. 아내의 한마디 한마디를 아이컨텍으로 경청하고, 전문적인 설명으로 신뢰감을 주고, 웃음으로 안도감을 주고, 칭찬으로 자존감을 올려주고. 완벽한 코디네이터, 해설가, 상담가 그 이상이었다.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나는 유리인간인 듯 취급하듯 했지만 계속 어디서 봤지, 누구지 하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천천히 카운터에는 아내의 선택을 받은 애들이 하나둘씩 여사장님의 손에서 다시 옷걸이에 걸리지 않으려고 바싹 붙어 누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아내와 나는 그 가게에서 가장 깊숙한 줄 알았던 카운터 넘어 쪽문뒤에 있는 자그마한 화장실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행인1과 행인2가 보라색 조끼 덕분에 빨려든 블랙홀에서 무려 한 시간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 아내의 움직임이 느리지만 치밀하게 구석구석 탐색 을 하는 스타일이다. 나와는 정반대다. 한참 방치된 지인이 안쓰럽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 단골인 듯 한 중년 여성 둘이 들어와 예전에 구입했던 자기 옷과 같은 옷을 친구에게 추천하고 입어보고 샀다. 채 십여분도 걸리지 않은 사이에. 거기다 지난번에 못받은 듯 양말 사은품을 두개나 챙겨 총총이 사라졌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진행형이었고. 


그래도 가운데 보이는 카키색, 쥐색 바지는 내것임. 막 입는 베기 팬츠 2개 득템 ㅋㅋ

  

그렇게 최종 스코너 12에서 시작된 아이쇼핑이 실물 구입 118로 끝이 났다. 그 사이에는 일팔청춘 따님이 그런 것좀 입어보라고 추천하던 베기 팬츠 2개도 득템했다. 아내도, 여사장님도, 심지어 지인분도 나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고. 양손 가득 옷을 사들고 우리는 가끔 가는 커피집으로 향했다. 손목을 슬쩍 들어봤다. 걸음 수가 삼천보가 넘었다. 그리고 마음은 마음껏 봄날이었다. 이천만원이 되지 않는 신혼집에서 시작해 몇억이 되는 지금 집을 우리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아내다. 저기서 빌려 여기에 갚은 것이지만 대출하나 없는 집으로 만드는 데 한번도 쉬지 않고, 맞벌이에 스무해 넘게 뛰고 있는 아내다. 어릴때 부터 검소함이 몸에 베어 있어 위 아래 십몇만원이 넘는 정장 한벌 사지 않은, 그런 아내다. 몇번을 백화점에 가서 이런 옷 저런 옷을 사자고 해도, 항상 세일하고, 이벤트하는 층으로만 움직인다. 아예 백화점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결혼 후 상대적으로 씀씀이가 해픈 우리집과의 차이를 그렇게 양쪽의 부모에게서 느낀 지 스물 두해가 넘어간다. 음식은 언제나 넉넉하게, 먹을때는 아끼지 말고, 사람이 주눅이 들면 안된다.... 는 말을 듣고 자라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부모가 되어서 돌아보니 우리집은 가난했었다. 내가 몰랐을 뿐. 당신들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그렇게 먹고 마시는 걸로 위로를 삼았던 것이다. 두 형제가 주눅들지 않고 키우는 방식이라 당신들은 그렇게 악착같이 믿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허투르 살지는 않으셨지만. 


어제 아내가 퇴근을 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해장국을 같이 먹자고 했다. 바쁜 3월동안 한번도 뵙지를 못했었다. 내가 내내 야근을 해서도 그렇고, 주말에도 일이 끊이지 않아서도 그렇고. 어제는 막걸리까지 하나 시켜 나를 빼곤 원래 술 못 드시는 세 분이서 두어잔씩 주고 받았다. 이제서야 어느 정도 부모님은 진짜 주눅들지 않고 사는 방법에 대해 체득중이신 듯 하다. 요즘은 해장국 한 그릇에서도 아내에게 고맙다고 자주 표현을 하신다. 엄마 - 어머니가 나에게 엄마가 된 지는 코로나가 시작한 뒤 부터다. 그 이전에는 어머니, 어머니라 부르는 게 익숙했는데 왠지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일팔 청춘 따님이 가끔 놀리지만 그래도 난 엄마가 좋다 - 는 아내에게 보고 싶었다고, 커피도 마시고 싶었다고 짧은 고백(?)까지 하셨다. 도통 그런 저런 표현이 없이 자주 롤러코스터같은 표현 투성이었는데.


이렇게 싸구려 쇼핑을 한 두번 하는 동안 아내는 마음 부자가 된다. 아주 건강해진다. 옆에서 보따리를 들고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어만 줘도. 그런 아내를 보다 보면 나는 진짜 부자가 된다. 그렇게 나는 양손 가득 아내를 소중하게 안듯 들고 참기름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아내가 먼저 그랬다. '자기야. 근데 아까 그 여사장님. 그 배우 많이 닮았지. 그치?' '그치? 나도 어디서 자꾸 본 사람 같더라. 근데 누구?' '아 왜 있잖아. 동백이 엄마로 나왔던 배우 이정은 배우. 여기 이 사람'. 안면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나를 가끔 놀리는 아내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못하는 나지만, 그 얼굴과 이름은 더더욱 연결 못하는 나지만 아내의 이름과 얼굴은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할거라고, 오늘같은 미끼들이 자주 걸려 들라고 속으로 티나지 않게 되내이면서 고소한 참기름집 앞에, 아내 옆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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