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Apr 16. 2023

칠면초

어릴 적 시커먼 동네에서도 맑은 물은 넘쳐났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에서 산속으로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언제나 쨍한 한기 속에 청량한 소리를 내며 콸콸거리던 계곡물. 계곡물은 엄청난 우주였다. 이름 모를 생명체들이 그득한 곳. 한여름에도 친구들과 누가 누가 오래 버티나를 내기하던 한기 가득한 곳. 지금도 발목 언저리에서 슥슥슥슥 베이는 듯한 한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계곡물은 그렇게 흘러 다시 시커먼 물과 만나면서 사라진다. 그때는 아주 어린 나이가 그 계곡 깊은 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치고, 주변을 탐색하면서 가재를 잡고 커다란 돌밑에 잠자고 있던 개구리 무리들을 못살게 굴기만 했었다. 꼴꼴꼴꼴 거리면서 또아리 틀듯 웅크리고 있던 개구리들을 그냥 양손으로 떠서 들고 간 페트병에 주어 담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들은 중1 첫날 나의 따귀를 갈긴 담임선생님에게 뇌물(?)로 제공하곤 했었다. 개구리가 든 하얀색 통을 들고 토요일에 사라졌다 월요일에 나타나면 왠지 나를 더 예쁜 눈으로 쳐다봐주는 것 같았다, 는 안도의 착각속에 빠져 있었던 때이다. 지금은 개구리를 잘 볼 수 없다. 그리고 있다 해도 잡지 못한다. 생태계 보호 차원에서. 


개구리는 양서류이다. 양쪽에서 다 서식하는. 땅과 물 사이를 오가면서 두 세상의 장점을 이어주는. 그리고 그 두 세상의 단점을 상쇄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그래서 개구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계곡물과 주변 땅은 개구리조차 잘 살게 만들어 주는 깨끗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괜찮다고. 여기 괜찮다고. 


개구리처럼 땅과 물을 이어주는 생명체가 또 있다. 바로 갯벌.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해안 지형이다. 자연이, 지금 상태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되는 생태 지형이다. 공식적인 표현으로는 wet land. 즉, 습지다. 갯벌은 세상 오만가지 노폐물을 걸러서 좋은 것만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지구와 그 위에 발딛고 사는 지구인을 지키는 아주 소중한 공간이다. 지구의 콩팥이다.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고 태풍과 해일로 부터 지구인을 지킨다. 게다가 근처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들을 다 내어주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렇게 산꼭대기에서 시작한 계곡물이 끝없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궁극에는 바다로 들어간다. 가재, 개구리와 동네 개구쟁이들이 첨벙거렸던 세상의 모든 계곡물은 그렇게 바다로 스며든다. 다 받아주는 바다 덕분에. 하지만 그 대가는 짭조름한 염분이다. 자신의 생명에는 원래 없었던, 때로는 가혹할 수 있는 뜨거움, 따가움.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그 뜨거움과 따가움을 천천히 받아들이라고, 충분히 연습하라고 아무 말 없이 넓게 깊게 버티고 있는 세상 모든 생명의 안식처. 그게 갯벌이다. 바다이지만 오로지 바다가 아니다. 시작은 계곡물이었다. 하지만 바다와 육지의 관계를 극명하게 갈라내면서도 이어주는 경이로운 공간이다. 바닷물에 잠겨 있는 갯벌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 짐작만 가능할 뿐.


하지만 개구리가 그랬듯이 여기서부터 바다와 육지가 이어져, 아니 갈라져라고 외치는 생명체가 하나 더 있다. 세상의 뜨거움, 따가움을 알리는 생명체. 소금기를 빨아들여 몸 안에서 고되게 잘 정화하는 식물. 그 고된 결과를 일 년에 일곱 번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명력을 간절히 기도하는 염생 식물. 칠면초다. 그래서 칠면초다. 


몇 년 전 석모도에서 찍은 칠면초. 코스모스 뒤 갯벌에서 자주빛으로 펼쳐져 있다. 이 사진은 아내가 찾고 찾고 찾아서 보내줬다


경계에 있으면서도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지구와 지구인을 지키는 데도 꼭 필요한 존재. 그게 칠면초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계곡물에 발을 담갔을 이들. 그들을 기억하는 힘없는 가재, 개구리. 그리고 자신이 계곡물이었는지 바닷물이었는지 구분하지도 못하는 이들. 나와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따갑고 뜨거운 삶을 이어 나가 나에게 까지 닿은 이들.


황사와 미세먼지가 여전히 가득한 오늘. 칠십여 년 넘게 그렇게 운명적으로 닿았던 바다와 육지의 그 어디쯤에 일 년 열두 번도 더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살아내려 했던 이가 그의 계곡물과의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날이다. 개장. 이장. 화장. 허릿병때문에 오랜 시간 앉아 있지를 못해 함께 하지 못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 낸 이가 앞으로 그렇게 살아낼 이에게 하는 당부만은 잊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당신이었음을. 언제나 경계인의 역할,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끊어내는 역할을 묵묵히 하였음을. 짠물과 민물을 모두 이겨내는,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번아웃되지 않는, 언제나 꼿꼿이 살아낸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당신이었음을. 


이전 05화 미끼 조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