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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13. 2023

쉰생아의 글놀이

나의 공간 여행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 나는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게 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공간space에 존재한다. 규모, 위치, 상태, 형태, 의미, 목적, 용도, 정체성이 다를 뿐 모두 각자의 공간에. 그곳에서 자신의 쓰임이 생기고, 삶이 전개된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한다. 그 이동속에서 다양한 삶의 영역이 확장된다. 각자의 삶의 영역이 확장되는 과정. 그 과정속에서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성격의 특징을 지니게 되는 공간을 창조하게 되면 우리는 그곳을 장소라고 부르게 된다. 그래서 공간을 장소place로 기억한다. 나의 추억의 장소, 기억의 장소로. 이푸 투안의 말처럼 공간은 경험을 통해 장소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경험히 켜켜이 쌓인 장소에 존재한다. 특정 장소에서 느끼는 나의, 우리의 안정감, 친근감을 장소감placeness이라고 한다.


오늘은 알람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눈이 떠졌다. 몸이 가볍다.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엎드린다. 상체만 젖힌다. 목, 등, 허리, 허벅지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몸이 더 가뿐하다. 수면 테이프를 떼어 낸다. 맑은 물로 입속을 헹궈 낸다. 뻑뻑했던 입속이 말캉거린다. 양치를 할 때의 상쾌함에 비어 있는 내장까지 전달된다. 그 느낌을 즐기면서 나는 나의 13층 허공의 새벽 공간, 나만의 장소 [토필]로 넘어간다. 출근 준비전까지 두시간. 나만의 새벽 놀이, 더(많은) 글놀이Glnoli 타임이다.


[토필]. 내 글놀이 공간을 나는 그렇게 부른다. 위치와 형태상으로는 베란다다. 하지만 베란다는 나만의 장소가 아니다. 나의 온기, 생각, 감정, 향, 소리가 묻어 있는 나의 공간. [토필]은 이푸 투안의 표현대로 ‘토포필리아’(topophilia), 곧 사람이 장소와 맺는 정서적 유대다.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에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붙인 조어이다. 나는 이 용어를 너무나 사랑한다. 우리는 어느 한 순간도 나, 우리, 사랑이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가진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그렇게 느끼지 못하거나 덜 느끼기 때문일 뿐. 토포필리아를 줄여 [토필]이라고 한 이유는 필이 중의적으로 쓰다의 의미(筆)를 포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토포필리아는 [나와 정서적 유대가 깊은 쓰는 공간]의 개념으로 확장을 시킨 것이다.

토포필리아는 오랫동안 나의 폴더명이기도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실질적이고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둔 온라인 공간. 이푸 투안식으로 원래의 의미는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맘껏 뛰어 노는 곳>이다.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지 늘 궁리하는 공간, 자발적인 힘의 공간, 그 힘으로 쓰는 공간, 그곳이 나의 13층 허공의 새벽 공간 [토필]이다. 물론 TV를 없애고 거실에 커다란 책장으로 서재를 만들어 놨다. 하지만 자궁처럼 은밀하지만 아늑한 공간. 생각과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이 나에게는 [토필]이다.


암막 커튼과 창문을 사이로 새벽과 내가 나란하다. 새벽 허공에 둥둥 떠 서 있다. 참, 가볍고 상쾌하다. 길이는 상관없다. 나를 잘 털어낸 글을 쓰거나 다른 이들의 글을 읽어낸다. 물론 여러 집을 만들려다 집집마다 벽돌 한 두개 쌓다마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그렇게 새벽을 채우고 출근을 할 때는 내가 집을 밀어내고 당당하게 나간다. 가슴이 저절로 펴진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정신이 맑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과 눈인사도 나눈다. 아랫집 사장님과는 오랜 동네 친구처럼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집에 행사가 있거나 일이 많거나 몸이 불편할 때가 있다. 그렇게 새벽 글놀이를 즐기지 못한 날에는 출근할 때 집이 나를 밀어낸다. 세상 밖으로 내 던진다. 입 속이 마르다. 출근하는 내내 라디오 소리가 나의 글감에 묻힌다. 라디오 소리를 죽이고 떠오르는 문장을 클로버 노트에 녹음한다. 그래도 출근하자마다 퇴근하고 싶어진다. 가끔 집에 있어도 집가고 싶은 생각이 들때처럼. 잠깐 눈만 붙이고 새벽에 일어나 공부해야지, 했던 학창 시절의 수없이 허망했던 아침처럼. 그러나 그렇게 요란스럽게 애쓰지 않는다. 언젠가 아내가 웃으면서 그러나 단호하게 '그건 자기가 선택한거잖아'라고 한 적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는 행동 말이다. 물론 남매들이 어릴적에는 새벽에 잠드는 날이 많았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는 새벽보다는 늦은 밤을 같이 공유해야만 했다.


여섯 해를 넘게 만나다 스무 해를 넘게 같이 살면서. 때로는 그 서운한 단호함이 명쾌할 때가 있다, 는 걸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이가 들면서 '선택', 그 말이 진리라는 걸 체득하고 있다. 아내도, 새벽도, 심지어는 지금의 나도 나의 선택이었다. 늙어갈 지, 익어갈 지도 선택이다. 이제는 나를 만나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찬찬히, 들려 주는 말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새벽 글놀이는 전적으로 쉰생아 - 어느 날 아내가 나의 선택을 강조하면서 따님에게 한 표현이다. 아빠는 쉰생아야 라고. - 를 허락해 준 아내와 딸의 무언의 협력 덕분이다. 그래서 나의 금요일은 진짜 불금이다. 불타는 금요일이 아니라 불리하지 않은 금요일. 월화수목, 토는 내가 불리하다. 쉰생아인 덕분에 아내와 딸은 둘이서 잘 먹는다, 잘 논다, 잘 쉬고 늦게까지 잘 잔다. 그래서 금요일은 토요일 새벽, 글놀이의 반납을 예고하는 치팅데이다.


13층의 새벽 허공에 서서 마주하는 하는 건 나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결과의 총합이다. 무엇을 선택하건, 그건 선택하는 주체의 몫이다. 오로지. 다만, 선택하는 과정에서 조언을 구한다. 도움을 요청한다. 도움이 주어지기도 한다. 기회다. 물론 준비된 경우라야 던져진 기회가 기회인 줄 안다. 기회인 줄 알아야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선택을 준비하고, 선택하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당연히 다 다르다. 같은 듯 다르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비슷하지 않다. 나의 그것은 이곳, 13층의 새벽 공간에서 나온다. 여기서는 슬픈 일도 잊고 미운 사람도 잊을 수 있다. 무서운 태풍속에서도 여유롭게 나는 것 자체를 즐긴 갈매기, 조나단이 되는 짧은 순간이다. 깊은 공간이다.


어릴 적 무의식속에 남아 있는 광고 문구중 하나. '저, 엘라스틴 했어요'. 그렇다. 피부 탄력은 콜라겐이 만들지 않는다. 그 콜라겐을 단단히 잡아 주는 엘라스틴 때문이다. 내 영혼의 탄력은 바로 엘라스틴 같은 나의 이 순간, 이 공간 [토필]에서 시작된다. 사랑을 넘치는, 정서적 유대감이 깊은 나만의 공간 찾기, 갖기, 살기. 여행의 본질이다. 이렇게 쉰생아의 글놀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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