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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14. 2023

초록심장 하얀심장

봄비가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출근을 준비합니다. 월화수목금. 일어나서 차를 오르기까지의 연속 동작입니다. 새벽 4시 반경부터 6시 반경까지 글을 씁니다. 쓰고 읽습니다. 내서랍을 정리합니다. 그러다 보면 타닥이-우리집 반려견 코코입니다. 6시가 조금 넘으면 엄마옆에서 저에게로 달려옵니다. 닫혀 있는 유리문 너머까지. 그 네 발로 거실 바닥을 달려오는 소리가 너무 경쾌합니다. 타 다다다~~~~ 닥!. 마지막 닥! 소리에 유리 너머 하얗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 가 와서 노크를 합니다. 


 그 노크 소리에 글을 저장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줍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희미해지는 교차로 그 어디쯤입니다. 서서히 날이 길어지면서 타닥이가 달려온 그 길이 훤해집니다. 내가 거실로 들어서면 타닥이는 반가움의 엉덩이 댄스를 춥니다. 현란한 춤솜씨가 따라 하기 쉽지 않습니다. 엉덩이 근육이 탄탄하게 나를 봤다 앞을 봤다 한 바퀴를 돌았다가 합니다. 새벽 댄스가 너무 경쾌합니다. 몸이 화알짝 늘어지면서 개운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거실로 걸어 나와서 거실 등을 딸깍하고 켭니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밝아지면 타닥이는 밥그릇 앞에서 두 번째 엉덩이 댄스를 춥니다. 앉았다 일어났다 어쩔 줄 모릅니다. 밥을 달라는 겁니다. 여기 자기 밥통이 있다는 겁니다. 그 밥통에 자기 밥을 들어 있다고 다시 겅충겅충 알려줍니다. 타닥이에게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없습니다. 오늘은 그냥 오늘인 겁니다. 유일한 오늘인 겁니다.   


밥을 부어줍니다. 그러면서 밥통 맞은편 벽 아래를 돌아봅니다. 타닥이의 밤새 안녕의 흔적이 노오랗게 넘쳐 납니다. 새하얀 패드 위에 온 온 우주가 샛노랗습니다. 하지만 몇 주 전 아침. 샛노래야 하는 패드 위에 연분홍빛 방울이 군데군데 있었어요. 급한 마음에 따님이 병원문 열자마자 달려갔는데 담석이 있었다고. 아침, 저녁으로 사료에 약을 섞어 준 지 2주가 넘어갑니다. 처음에는 약 냄새 때문에 잘 먹지 않던 타닥이가 이제는 잘 먹어요. 그래서 다시 새하얀 패드 위에 샛노란 우주를 다시 열심히 그려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패드를 팍팍 흔들어서 새 걸로 깔아줍니다. 그러는 동안 타닥이는 여전히 뒤에서 아침밥을 꼬드득 꼬드득 먹고 있어요. 


그런데 벽에 탁 붙어 있는 새하얀 패드 세 면에는 특별한 장치(?)를 세워두었어요. 어릴 때 배변 연습을 시키는 시기를 놓쳤지 뭐예요. 그러다 보니 화장실은커녕 뒷 발만 패드 위에 올려놓고 이미 패드를 뛰쳐나올 기세로 오줌을 자주 눠요. 아홉 살인데 말이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새하얀 패드보다는 거실 바닥에 쉬한 흔적이.... 그래서 앞에는 턱이 있는 나무를 양쪽에는 화분을 옮겨다 놨답니다. 철옹성(?) 같은 쾌적한 환경에서 마음껏 볼일을 보라고. 그렇게 일 년 가까이해 보니까 확실히 효과가 있더라고요. 패드 안에서만 쉬를 잘해요. 뭐, 가끔 새벽어둠 속에서 바닥까지 연결해서 쉬를 할 때도 있지만. 그때는 보통 오줌 누기와 다시 잠자기의 연속 동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정도는 애굡니다. 


타닥이 패드 있는 거실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고 패드를 새 걸로 깔아주면 이제 주방으로 갑니다. 포트에서 물을 끓여서 한잔 가득 마셔야 하거든요. 오래된 습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키가 불쑥 큰 화분잎을 보느라 어제는 잊었습니다. 지난주 월요일 아침. 오른쪽 키 큰 화분에서 새싹이 살짝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뱅갈고무나무입니다. 좁쌀 서너 개가 이어진 크기의 새순이 수줍게 쏘옥하고 연하디 연한 몽우리를 내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제 아침에 보니까 글쎄 이렇게 많이 올라와 있는 겁니다. 일주일 시간 참 빨리 간다, 벌써 불금이야 하는 식구들의 호들갑 소리를 들으면서도 매초 매분 쉬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계속 생명력을 키워낸 겁니다.  


그 잎을 보니 참 경이롭습니다. 원래 있던 잎과 확연하게 다른 색깔과 모양입니다. 먼저 난 잎은 짙은 초록색에 가깝고 두껍습니다. 약간은 거무스레합니다. 물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도톰합니다.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밑동을 지키면서 위에서 버둥거리는 여린 잎들을 여그롭게 지그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말수 적고, 차분하고, 당당하지만 도드라지지는 않는 멋진 어른 같습니다. 어른스러운 어른 같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옆에서 같이 하고 싶은 의젓한 사람 같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열심인 싱싱한 심장 같습니다. 



거기에 비해 방금 새로 올라온 이 잎은 딱 봐도 연하게 생겼습니다. 투명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초록잎에 물을 쭈르륵 뿌려주면 쪼옥 찢어질 듯 투명합니다. 연초록 심장이 옹콩, 옹콩, 옹콩거리며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쵸쵸초추 하면서 힘겹게 힘겹게 물을 길어 올려 지나갈 듯한 손가락 지문 같은 가는 선들이 막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 수분을 저장하는 통로와 공간을 그리 넉넉하게 만들지 못했나 봅니다. 길쭉하기만 한 이파리 주변이 쪼글 하게 말려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손으로라도 살금살금 펴주고 싶어 집니다. 아, 또, 그 여린 심장 아래에 또 다른 새순이 볼록하게 올라와 있네요. 


남매들을 키우면서 자주 느꼈습니다. 다른 집 애들은 그냥 크는 것 같다고. 하지만 어떤 생명도 그냥 크는 건 없지요. 이렇게 매 순간 매 순간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키워내야 하는 거지요. 스스로 키우고 주변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아야 그렇게 크는 서지요. 우리가 바쁘다는 이유로 그렇게 다 키워진, 성장한 결과에만 주목하는 데 익숙해져만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는 건 세상사 진리입니다. 봄꽃, 봄비, 봄눈, 봄볕도 혹독한 겨울이 있어서 가능했을 테니까요. 저 여린 잎들도 조만간 아래에서 떡하니 받쳐 주고 있는 어른잎이 되어 갈 겁니다. 


묵묵히 지켜봐 주면, 옆자리를 지켜주기만 해도, 한마디 안부를 물어 준 그 힘으로 어른, 아이 다 각자 잘 살아내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다른 듯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줄기로 다 이어진 건지도 모릅니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통로로 생명의 물을 꾸준히 길어 올리는 정성과 고단함. 그 덕에 옹콩거리는 연초록 심장이 쿵쿵거리는 건강한 어른 심장으로 당당하게 펄떡이고 있는 거지요. 출퇴근할 때 마주치는 수많은 자동차 속 주인들. 그 주인들의 가족들. 그 가족들의 지인들. 그 지인들의 가족들. 그렇게 우리는 단단한 척 여린 그리고 가끔은 누렇게 바래는 이파리여도 다 연결된 거지요. 그래서 어제 아침. 뱅갈고무나무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 출근하는 그 길은 그제와 또 같은 길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하물며 작년, 재작년의 그날과는 전혀 다른 유일한 날이었습니다. 


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른잎과 여린 잎 사이에 새하얀 심장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는 밥통에서 꼬드득 꼬드득 기분 좋게 잘도 씹어먹습니다. 몇 주 전 생긴 담석을 녹이기 위한 치료용 사료입니다. 이제는 작디작은 뱃속에서 담석이 다 사라졌기를 기도합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하루 종일 연초록 심장과 새하얀 심장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요. 그 자리에서, 자기 자리에서 반복되는 밋밋한 기다림 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을까요. 수많은 그 이야기 속에 아마도 '살아내자. 이왕이면 잘 살아내자'는 다짐은 분명하게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오늘은 묵묵하게 싱싱한 하루를 살아내는 나의 심장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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