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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18. 2023

봄 같지 않은 사람

4월도 가운데를 지나쳐 갑니다. 아 봄이네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봄꽃이지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데 지대한 원인이 되는 게 봄볕인 건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봄볕은 겨우내 움츠려 있던 것들을 활짝 피게 만들어 주는 마술사입니다. 사람도 그 마술사에 룰루랄라 하게 됩니다. 산책을 하고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지요. 선크림을 발라 주어야 할 정도로 자외선 지수도 갑자기 높아집니다.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못된 속담이 전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며느리 그리고 따님과 같이 사니 둘다 소중하거든요. 


그렇게 말 그대로 봄 햇살은 샤이니shiny입니다. '빛나는, 반짝이거나 광택이 나는 외관을 가진'의 어원을 가진,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꽃길만 걷고 싶은' 우리 인생에서 꼭 필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의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면역계 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게 비타민D라고 합니다. 훌륭한 능력을 지닌 우리의 몸이지만 스스로 몸속에서 비타민D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하지요. 샤이니한 햇빛을 받아야 비로소 몸속에서 생성된다고요. 그래서 샤이니한 봄이 오면 겨우내 숨죽였던 온몸이 알아서 알아서 움직여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도. 


하지만 봄은 샤이니하지많은 않지요. 봄꽃에 취하나 싶었는데 봄비가 내립니다. 겨우내부터 메말라 있던 온 세상의 건조한 대지를 적셔주고, 가을 수확을 미리 저장하는 거라고 기쁘게 생각해 봅니다. 그걸 보면서 나의 건조함도 조금은 가시는 듯 하긴 합니다. 하지만 바로 꽃샘추위가 따라옵니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머플러가 참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러는 동안 산 넘어 동네에서는 건조해서 산불이 연일 일어나기도 합니다. 지지난주에는 전국 스물 두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네요. 숲이 타들어가는 게 마음 타들어 가는 것 같아 불편하지요. 그 마음을 가지고 또 고스란히 받아 안아야 하는 또 다른 봄이 찾아옵니다. 바로 미세먼지, 황사지요. 4월 둘째주부터 셋째주로 온 세상 가득하게 이어지더니, 오늘은 조금 나아지려야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면 받고 싶지요. 받고만 있으면 불편해집니다. 인지상정 - 사람이면 보통 가질 수 있는 인정 - 입니다. 날씨도 마찬가집니다. '인지상기(氣)'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몸과 마음은 날씨, 즉 기상 상태에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날씨가 궂으면 몸이 먼저 가라앉습니다. 날씨가 업다운이 있으면 몸의 업다운은 더 심해집니다. 그러면 뒤이어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하지요. 꿀꿀해지는 겁니다. 글루미gloomy해지는 겁니다. 글루미의 어원에는 '우울한, 어두운, 처진, 탁한 그리고 무뚝뚝한glum, 변덕스러운moodiness'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지상정이어도 단어들 자체가 정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눈에 탁 꽂히는 어원이 '무뚝뚝, 변덕스러운'입니다. 


딱 지금의 봄날씨 같으면서도 딱 얼마 전까지의 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어 지기 때문입니다. 글쓰기 전의 내가. 몸나이가 물리적으로 많아진다는 건 분명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많이 많이 더 많이 겪은 것이라는 의미 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 속에서 정작 어떤 어른으로 잘 익어가는지는 생각하지를 않았다 싶네요. 아니, 오히려 더 내 안의 어린 나에게 시비를 걸고, 그 어린 나를 핑계 삼아 몽니를 부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열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물질 1그램의 온도를 1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입니다. 이 원리에 의해서 동네마다 기온차도 나고 바람도 불고 비나 눈이 내리기도 합니다. 온 우주의 거대한 순환의 시작점입니다. 땅은 물에 비해 비열이 작습니다. 비열이 작다는 건 온도가 변화하는 데 필요한 열량이 적다는 의미입니다. 조금만 열을 받아도 훅훅 변한다는 말입니다. 업다운이 심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땅은 바다보다 요란스럽습니다. 잔잔한 바다보다 훨씬 더. 


그런 땅 사이사이를 또 요란스럽게 흘러넘치는 게 계곡, 개울, 샛강, 강입니다. 하천입니다. 물이 흐른다는 건 위와 아래가 있다는 거지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니까요. 그런데 물은 곱게 곱게 흐르지많은 않습니다. 흐르면서 바닥과 주변을 깎아서 여기저기로 옮겨다 쌓아놓습니다. 우리가 땅 사이사이에서 때로는 감탄하면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모습들이 거의 다 흐르는 물이 만든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과정에서 하천 속 자갈들은 어디에서 얼마나 물에 잠겨 있었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집니다. 어릴 적 계곡물에서 다이빙을 하고 놀다 보면 가끔 발바닥이 베일 때가 있습니다. 하천 주변 여기저기에는 깨진 유리 조각만 있는 게 아닙니다. 더 날카롭게 쪼개진 돌멩이들이 있는 겁니다. 아직 덜 다듬어져 성이 잔뜩 난. 하지만 그렇게 하천이 계속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가 바다가 가까워지면 그제야 그 성난 자갈들이 동글동글해집니다. 모난 돌이 정 맛는다는 세상 진리를 그제야 받아들이는 듯 말입니다.  


봄날씨를 이야기하다 보니 익어간다는 게 몸나이 먹는것 만큼 그리 순리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면서 진짜 큰 사람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삼십년 가까이 배우고 익혀서 또 삼십년 가까이 그걸로 먹고 살면서 또또 삼십년을 다시 준비하는 과정속에서 참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 새벽 조용히 혼자 더듬거려 봅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는 줄, 

내가 사라지면 큰 일 나는 줄, 

나의 일이, 지금 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줄,

내가 하는 만큼 언제나 인정을 못 받는 줄, 

인정이라도 받으면 하는 일을 더 잘하게 될 줄,

내가 한번 흔들리면 세상이 다같이 흔들리면서 위로해 줄 줄



알았던 그때의 내가 떠올라 가슴 한켠이 새콤하게 스먹거립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듭니다. 아, 큰 사람은 봄꽃처럼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고. 나보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흐드러지게 피면서 봄눈을 마음껏 휘날리지 않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던 여름, 가을, 겨울의 이름 모르고 수없이 스쳐 지나친 나무 기둥이었다고. 



그래서 사람다운 큰 사람은 몸나이와는 관계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그 말은 그 말이지 싶습니다. 



지식보다는 지혜가 많은 사람

성취보다는 성장에 목말라 하는 사람

빨리보다는 느릿느릿 걷고, 먹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봄, 저런 봄 다 받아 안아 줄 수 있는 사람 

그렇게 그렇게 변덕스럽지도 무뚝뚝하지도 원하지 않는 친절을 풀어내지도 않는 사람 

그래서 봄 같지 않은 큰 사람



내 안에는 언제쯤 그런 큰 사람이 들어 차게 될까요. 내 안의 어린 나에게 묻습니다. 쓰면서 묻습니다. 오늘도 글로 그렇게 묻고 또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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