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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Dec 22. 2022

저멀리 판도라 말고, 우리 곁의 지구

<아바타>

공개된지 어느덧 13년이 훌쩍 지난 작품, 게다가 웬만큼 볼 사람은 다 본 초거대 흥행작을 두고 이제와 영화의 수정주의 서부극 같은 전개와 환경주의적 테마를 언급하며 가타부타 하는 것 자체가 좀 웃기긴 하다. 10여년의 세월동안 많이 이야기 되어 왔던 부분들이기도 하고. 하지만 영화의 수정주의 서부극스러운 전개는 그렇다치더라도, 그 이야기가 띄고 있는 환경주의적 테마는 이야기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을 것. 


왜냐하면 13년 전의 지구 환경과 13년 후 지금의 지구 환경이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 물론 그 판이한 변화는 13년 전에도 예견된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과 기후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경고하지 않았었나, 이대로 가면 환경은 물론 인간들조차 위험해질 거라고. 그러나 <돈 룩 업>이 묘사했듯, 대중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지. 그것 또한 엄밀히 따지면 대중들의 무지함이라기 보다는 각계각층 높으신 분들의 눈가리고 아웅 전법이 먹혀든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바로 그런 현 상황 때문에, 13년 전에 개봉 되었던 <아바타>의 환경주의적 테마는 지금에 와서 오히려 더 힘을 얻는다. 개봉 당시 그런 해외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가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일종의 '판도라 증후군' 같은 것들이 일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영화 속 가상의 행성인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일부 관객들이, 그 판도라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느끼게 되는 우울증. 여러 대중매체들 속 아름다운 프랑스 파리의 모습에 현혹되었던 사람들이 실제 파리로 여행가서는 괴리를 보며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고 하지 않나. 어쩌면 판도라 증후군도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극중 제이크 설리 마냥 나도 저기 들어가 살고싶어지는 세상이 있는데 그게 다 가짜라니. 거기서 오는 빌어먹을 절망감. 그 때나 지금이나 한 켠으로는 '조금 과몰입 하는 것 아닌가?'라는 솔직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아예 이해 못할 부분은 또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 속 판도라의 생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바로 그 점에서 <아바타>는 훌륭한 SF 서사극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의 기본 얼개는 수정주의 서부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난의 의미가 아니다. 이런 규모의 영화일수록 이야기는 단순한게 효과적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이야기가 뻔할 뿐 나쁜 건 또 아니었기에 더더욱.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창조해낸 감독의 연출적 역량인 것이다. 아니, 연출적 역량이라 하기 보다는 창조적 역량. 조물주적 역량이라고 해야할까. 말그대로 제임스 카메론은 하나의 세계를 온전하게 창조해낸 것이다. 영화 속에서 선보여지는 판도라의 여러 지상 생물들. 그리고 이크란 등의 괴조들로 표현되는 날짐승들. 게다가 하나하나 식물들의 디테일까지. 생태적 면모도 그러한데, 극중 인간들이 사용하는 메카닉들의 디테일도 장난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아바타>의 그것들보다 훨씬 더 멋지고 화려하게 디자인된 메카닉을 선보이는 영화들은 많았다. 하지만 <아바타>의 메카닉들은 소위 말해, '그럴 듯하다'. 정말로 존재할 것 같고, 한눈에 봐도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있고, 또 기계에 대해 잘 몰라도 대충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얼추 파악이 되는. 십수년 전 <에이리언2>의 개인화기들 내에 남은 총탄의 개수를 알 수 있는 숫자 패널 하나 집어넣은 것으로 실재감은 물론 서스펜스까지 만들어낸 감독의 실력이 그동안 어디 가지는 않은 거지. 


더불어 영화의 제목이 '판도라'가 아니라 '아바타'라는 점이 안그래도 3D 효과 덕에 깊어보이는 영화를 더 깊게 만든다. 두가지 육체에 깃든 단 하나의 영혼. 게다가 그 자리조차도 원래는 제이크의 것이 아닌 그 쌍둥이 형의 것이 아니었던가. 두가지 육체를 통해 두 세상을 오가던 제이크 설리는 결국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한 동족들을 배신하고 끝내 판도라와 나비족의 편에 선다. 직접 그 육체를 느끼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받은 공감. 판도라를 사랑하는 네이티리, 그리고 나비족의 마음에 공감하게 된 제이크 설리는 결국 그렇게 동족들을 배신하게 된 것이다. 그 부분에서는 리부트 버전의 <혹성탈출> 시리즈를 봤을 때랑 비슷한 마음이 들어 좀 이상하기도 했다. <혹성탈출>과 마찬가지로, <아바타>를 볼 관객들은 100% 모두 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 아닌가. 헌데 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관객들은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한 동족들이 극중에서 마구잡이로 죽어나가는데도 오히려 거기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자신들과 다른 모습을 한 유인원, 그리고 나비족들을 응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움직이는 공감, 그리고 이야기의 힘 아닌가 되짚어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또 수정주의 서부극의 장점들로 회귀 되는 것도 있고. 


돌고 돌아 다시, 결국엔 환경주의적 테마로. 앞서 말했다, 13년 전 이 영화가 흥행하던 당시 이른바 '판도라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이 생겨났었다고. 저렇게나 아름다운 세상이, 그저 스크린 안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일 뿐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다. 이미 익숙해져서 그렇지, 저 스크린 안의 판도라 못지 않게 아름다운 지구가 스크린 밖 우리 곁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지구가, 극중 판도라로 넘어온 인류처럼 현생 인류에 의해 똑같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 또한 불편한 진실로써 다 알고 있지. 에이와가 그랬던 것 마냥, 지구 환경의 여신이 지상 위 모든 동물들을 규합해 단체 행동하게끔 만들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판도라에서 에이와가 그랬듯, 지구에선 우리가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 대량 멸종위기 등의 환경적 재난들을 직접적으로 설파하며 꽹과리를 울리는 관련 다큐멘터리나 영화들도 물론 훌륭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바타>가 더 우리를 등떠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지구를 이미 우리는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판도라 마냥 잃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들 잘 처신 하라고. 아-, 오늘은 그동안 미뤄왔던 집 한 구석 화분들에게 물을 주고 더불어 함께 미뤄왔던 분리수거 쓰레기 배출을 해야겠다. 


<아바타> / 제임스 카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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