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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an 28. 2023

광활한 사막 속의 한 줌 모래 알갱이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랜드 케니언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자연 속 풍광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하게 될 때, 사람은 겸허한 태도가 된다고들 말한다. 이 거대한 규모 앞에서 나란 인간은 한낱 미물일 뿐이구나-라는 데에서 오는 깨달음.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는 그 거대함이 광활하고 아름다운 사막이고, 그 미물이 로렌스다. 다만 로렌스도 그 사막을 목도하고 바로 깨우침을 얻은 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언뜻 오만해지기 까지 했다. 이 광활하고 아름다운 사막의 운명이, 온전히 내게 달려있구나. 내가 이 모든 역사의 흐름을 한 번에 좌지우지할 수 있구나.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로렌스는 결국 깨닫는다. 아라비아의 영웅이자 선지자인 줄 알았던 나조차도, 알고보면 전역 당해 고향인 영국땅으로 돌아가게 생긴 그저 한 명의 군인일 뿐이구나. 로렌스의 이러한 깨달음을 영화적 형식 역시도 돕고 있다. 제목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이건만, 주인공 로렌스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전쟁터에서의 영광스러운 죽음도 아니요, 하물며 제목답게 아라비아에서 죽은 것조차도 아니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던 것인지, 고향 마을 외곽에서 신나게 오토바이를 몰다가 맞이한 죽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그렇게, 역사와 운명 앞에서 오만한 우리를 불러 바로 세운다. 


어쩌면 로렌스는 '믿음'이 전부였던 사람처럼 보인다. 등장하자마자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프롤로그를 거쳐 과거 시점을 통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본편에서, 로렌스는 가장 젊은 모습으로 첫 등장해 그 '믿음'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성냥에 붙은 뜨거운 불을 그저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끄는 로렌스에게, 대체 비법이 뭐냐 묻는 다른 군인들. 이에 로렌스는 말하지 않는가, "비법은 뜨겁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현실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분명히 뜨거웠을 그 성냥불을, 그저 뜨겁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끌 수 있다 말하는 남자. 다소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한 때 국내에서도 좌우명이나 사훈 따위로 꽤 유행했던 '하면 된다'의 일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 로렌스는 하면 된다고 여기는 믿음의 남자였던 것이다. 


그 덕분에 그는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규합해 엄청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성전이랍시고 칼을 들었던 인류 역사 속의 모든 종교인들이 그랬듯, 로렌스는 그 믿음 자체에 너무나도 깊이 빠져들고야 만다. 오직 나만이 이 아라비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 그들과 피부색이 다른 내가, 어쩌면 선택받은 구원자인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 그 복선은 선물받은 아라비아의 전통 의상을 입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감탄하는 그의 모습에서 조금씩 흘러 나오고 삐져 나온다. 알고보면 그의 '믿음'에 대상이 되어주었던 게 자기 스스로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깊이 믿어버리게 된 남자. 헌데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지나치면 때때로 독이 된다. 


그렇게 로렌스는 높은 공적을 쌓은 군인이자 영웅이 되었음에도 "집에 가서 좋으시겠습니다"라는 병사의 공허하게 느껴지는 인사말을 들으며 쓸쓸히 집으로 돌아간다. 광활한 사막 속, 그저 한 알의 모래 알갱이로 남은 남자. 사실 생각해보면 아라비아의 그 장대한 역사에서 로렌스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많았겠는가. 모두가 자신을 이 사막의 지배자로 여겼었겠지, 그러나 그 끝은 모두 한낱 모래 알갱이가 되어 자신이 지배한다 착각하던 그 사막 속으로 흘러 내렸을 것이고. 역사와 운명 앞에서 인간의 삶이 이토록 허무하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 데이비드 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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