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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Mar 06. 2023

영화와 배우가 서로를 구원했다

<더 웨일>

고래가 되어버린 남자를 아시오?


그 남자, 그러니까 그 고래는 한 대학교의 작문 관련 수업 교수로서 제자들에게 반복해 말해왔다. 본디 에세이를 비롯한 글쓰기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칠수록 나아지는 것이라고. 문맥을 다듬고, 문장을 깎으며, 단어들을 바꿔쓰면 느릴지라도 조금씩 앞을 향해 진군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후 잔뜩 비대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해 다른 이들 앞에 나설 수 없게 된 그 고래의 사연이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고치고 수정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동기를 잃었다고 봐야할지도. 그렇게 앞으로 헤엄쳐 진군할 동기와 용기 모두를 잃은 고래는, 이제 뒤로 떠내려가 후퇴할 이유 하나만을 붙잡는다. 살아갈 용기는 없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이유는 생겼다. 부디, 내가 하루라도 어서 빨리 죽어 남겨둔 유산으로 유일하게 남은 내 '작품'에 일조 하겠다는 이유. 고래에게 그 '작품'이란 자신의 딸이었고, 오직 그녀를 위해 그는 자기파괴적인 면모로 마지막 나날들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그 반항적인 딸과 서먹해진 전 아내, 신의 부름이랍시고 만난 젊은 선교사,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친구 사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고래는 끝내 깨닫고 만다. 때로는 가장 솔직한 단어가, 가장 진솔한 문장이, 가장 나다운 문맥을 갖춘 글이 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 낙제 직전인 딸의 과제를 도와주겠답시고 에둘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던 고래는 어느 순간 진실의 광명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 후반 내내 되뇌어왔던 명문으로 스스로의 진실된 모습을 꺼내어 딸에게 다가간다. 딸도 자신과 같음을, 딸 역시 자신을 원하고 있었음을 당당하게 부르짖으며 맨다리로 해내는 진군. 영화가 비추지 않은 마지막 쇼트 직후의 남자는 분명 쓰러져 그 쓸쓸했던 생애를 마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직전에라도, 남자가 가장 행복하게 여겼던 순간을 그에게 다시금 복기 시켜준 영화의 마지막 자비에, 정중히 감사 인사를 전하게 된다. 


브렌든 프레이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갓 앤 몬스터>로 젊음 그 자체를 연기 했었고, 이후엔 <조지 오브 정글>이나 <미이라> 시리즈 등을 통해 친근한 할리우드 액션 스타로 발돋움 했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통해 브렌든 프레이저는 거의 은둔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일반적인 관객의 눈으로 봤을 때 찬란 했던 그 시절 그 근육질 스타 이미지에서도 점차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랬던 그가, <더 웨일>을 통해 수면 위로 다시금 펄쩍하고 뛰어오른 건 정말이지 경탄할 만한 일이다. 


이따금씩, 영화와 배우가 서로를 구원할 때가 있다. 마약 중독 등으로 할리우드의 탕아가 되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이언맨>을 통해 구원받았고, <아이언맨> 역시 그를 통해 완벽한 토니 스타크를 구현해내며 구원받았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음에도 동양인으로서 별다른 중요 배역을 맡을 수 없어 영화계를 잠시 떠나 있었던 키 호이 콴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통해 구원받았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또한 키 호이 콴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으며 구원받았다. 더불어 <더 웨일>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역시, 과거 <더 레슬러>를 통해 미키 루크를 구원하고 또 그로 구원받은 바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어, <더 웨일>은 영화와 배우가 서로를 구원할 때가 존재한다는 그 명제에 대한 가장 최신의 증거가 되어준다. 


영화계에서 한 발짝 멀어진채 관객들 뇌리에서도 잊혀져가던 왕년의 스타 브랜든 프레이저는, <더 웨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연기력을 입증해내며 구원받았다. 하지만 어디 그뿐일까? 구원받은 건 <더 웨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만약 주인공인 찰리의 역할을 다른 배우가 했었다면? 브랜든 프레이저가 실제로 겪어왔던 그 파토스를 겪어보지 못한 누군가가 했었다면, <더 웨일>이 지금만큼의 파괴력을 과연 갖출 수 있었을까? 브랜든 프레이저는 강력한 에토스로 <더 웨일>을 구원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실제 삶을 영화 안으로 끌어옴으로써, 단순 특수 분장 이상의 무언가를 작품에 덧씌운 주연배우의 힘. 그렇게, 영화와 배우는 서로를 구원했다. 이번에도 말이다. 


<더 웨일> / 대런 아로노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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