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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un 16. 2024

악은 온유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 오직 유대인이란 민족성 하나만으로 판단되고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의 애끓는 비명이 일렁이던 곳. 그 지옥 같은 수용소와 벽을 맞대고 있는 한 집이 있다. 다름아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루돌프 회스가 사는 사택. 지옥과 오직 벽 하나만을 마주하고 있던 그 아름다운 집에서, 루돌프는 아내 및 다섯 아이와 꿈에만 그리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꿈만 같은 삶을 살아가는 루돌프와 그 가족들과는 달리,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카메라는 절대 그 벽을 넘지 않으며 침잠하고만 만다.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의아했던 것은 루돌프가 사는 사택의 위치였다. 학살을 주도한 수용소의 소장이라곤 해도, 어쨌든 그 사택에서 어린 자식들을 무려 다섯이나 키우고 있는 아비 아닌가. 그렇다면 그 아이들의 교육 환경을 위해서라도 직장인 수용소와 사택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했던 것은 아닌가. 내가 만약 당시 수용소를 설계했던 나치 담당자였다면 사택을 수용소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놨을 것이다. 헌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니 그 답은 명확해진다. 루돌프나 설계 담당자나 그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지독하리만치 무감각했을 거라는 답. 어쩌면 그들은 오직 출퇴근의 편의성만을 수학적으로 더 중요시 여겼을 거라는 답. 그런고로 그들의 관점에서 직장인 수용소와 사택 사이의 거리는 좁으면 좁을 수록 좋았을 것이다. 명확해지는 만큼 서늘해지는 답이란 이런 것이다. 


나치 전범이라는 것만 빼면, 솔직히 말해 루돌프는 꽤 성실하고 능력있는 인간이다. 직장에서도 신임 받고, 생일 때엔 부하들이 잔뜩 몰려와 기쁘게 악수를 청한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꽤 좋은 아버지라 할 수 있을 테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아이들에게 늦은 시간까지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이며, 조금 무심해보이긴 해도 격앙되어 있는 아내에게 먼저 손을 건네는 침착한 남편이다. 그런데 루돌프의 그 인간적 면모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더욱 더 차갑게 만든다. 하루에 몇십 몇백명을 죽여가면서도 그게 일상화된 인간의 삶. 인간의 삶이란 게 이렇게 차가울 수도 있다. 


영화내내 루돌프는 헛구역질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의 구토 수준의 토악질. 하지만 정작 게워내는 건 없다. 토악질 뒤라면 응당 토사물로 가득해야할 바닥은 건조하다 못해 깨끗하다. 더 이상 게워낼 게 없는, 그러니까 이미 다 소화되다 못해 체화되어 버린 악. 어쩌면 루돌프에게 악은 이제 행동이 아니라 본성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그래서 더 무섭다. 길길이 날뛰며 분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온유한 악이란 존재. 그 차분하고 느긋한 이미지와는 달리, 선이란 더 분투하기 마련이다. 현재 TV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만 봐도, 부조리한 현실과 상황을 조금이나마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발품을 팔고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것이 시위의 형태든 봉사의 형태이든 간에. 반면, 그 부조리함을 만들고 방조하는 이들은 대개 더 차분하고 더 침착한 면모를 더 보인다. 마치 이렇게 조용히 있으면 언젠가 이 모든 풍파가 곧 다 지나갈 것이라는 듯이. 


얼핏 보면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도 부군과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남편이 매일 어디로 출근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음에도 언제나 그런 그를 응원하는 모습. 벽 너머에서 어떤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가꿔놓은 정원만을 누리는 모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두고 꿈에 그리던 삶 아니었냐 기어이 자문하는 모습까지. 부창부수라고, 얼핏 보면 헤트비히도 루돌프와 똑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그 사이 틈이 조금 보이더라.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친정 어머니에게 정원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는 헤트비히. 헌데 어머니와 그녀 사이에 잠깐동안 고요가 흐를 때, 벽 너머의 비명 소리가 그 두 사람 귓자락에 울린다. 나는 헤트비히가 정말로 남편과 똑같은 태도를 갖고 있는 인간이었다면,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비명 소리를 덮어내기 위해 어머니에게 실없는 소리들을 해가며 바삐 정원을 가로지른다. 그러니까, 이미 악을 소화하고 체화해버린 남편과는 달리 헤트비히는 그것이 악임을 알고 있음에도 애써 모른 척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영화 말미, 뒤늦게 사무실을 나서던 루돌프는 무언가 인기척이라도 느낀 듯 어두운 복도 끝자락을 홱 돌려 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21세기 지금 모습들. 복도와 전시실을 이리저리 청소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담담하게 보여지더니, 이어 영화는 다시 과거의 루돌프에게로 카메라를 돌린다. 감독인 조나단 글레이저는 어쩌면 이 장면의 편집을 통해 스크린 바깥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희도 어느새 이 전쟁과 학살을 그저 옛 이야기로 치부하며 이미 다 체화해버린 것은 아냐?"라는 반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감독은 우리에게 계속해 말을 걸고 있다. "어쩌면 너도 다 소화해버린 것 아냐?"


<존 오브 인터레스트> / 조나단 글레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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