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기댄 따스함

by 소문자cho
러시아의 겨울은 세계 어디보다 뜨겁다?



어떤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이 기후의 부작용을 앓는다고 한다. 일단 쌀쌀맞아 보이는 인상이 날씨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서 캘리포니아식으로 함박웃음을 짓다간 앞니가 시릴 테니까. 음주문제도 유명하다. 일 년의 절반을 영하로 달리는 날씨에서 몸을 녹여보고자 술을 마시다가 술고래들이 되었다는 설이다. 러시아 살이에 관한 농담들은 이렇게 혹독하게 추운 날씨로 귀결되곤 한다.


한 서점에서 본 모스크바 여행기는 거의 ‘북극 생존기’였다. 표지 사진이 특히 압권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떤 냉풍도 깃들 틈 없이 온통 털로 무장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스치는 찬바람과 스산한 공기를 배경으로. 방어적인 옷차림으로 보나 앞니를 감춘 얼굴빛으로 보나 추위와 매서운 전쟁을 치르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러시아는 어땠는지 궁금한 독자에게 “추웠어요, 무척 추워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춥기야 춥지. 나도 대답했었다. “춥지 않아?” 내게 모스크바 생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물어왔으니까.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는 얘기, 처마 밑에서 시작된 고드름이 땅까지 이어진다는 얘기, 눈이 쌓이면 그 무게에 멀쩡했던 지붕이 주저앉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한바탕 하고 나면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정작 나는 광활한 백색 세상, 휘몰아치는 눈보라, 열흘씩 장설이 내리던 그 고장의 겨울에 대해 추웠다는 기억이 없다.


혹독한 추위엔 부작용만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건 하나였다. 모스크바의 추위는 정경이 있고, 재미가 있고, 온기가 있다는 것. 그곳의 추위는 한바탕 고생스러운 류가 아니라는 것.


그 표지 사진은 무스탕 안피의 보드라움을 몰랐다. 찌릿하게 시린 손을 샤프카 속으로 쓱 찔러 넣었을 때의 따듯함은, 애인이, 아니, 엄마가 쥐어 주는 핫팩 저리 가라다. 저 부츠 속 발가락들은 포근함에 꼼지락대고 있을 테다. 북극 생존의 진정한 백미는 ‘따스함’에 있다고, 세상 어디를 가도 러시아 사람들보다 따듯한 겨울을 보내는 곳은 없다고, 그곳의 일상은 방어가 아닌 ‘밀당’으로 이뤄져 있다고 나는 언젠간 꼭 말하고 싶었다.



어느 러시아인이 그랬다. 진정한 시베리아인은 추위를 안타는 사람이 아니라, 따듯하게 입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나는 쓴다. 겨울을 즐기는 옷차림은 따로 있다고.


그중 나의 최애는 ‘스노우 팬츠’다. 이 스노우 팬츠로 말할 거 같으면 딱 스키복처럼 생겼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폭신하다. 방수 재질의 바지 위에 길이 조정 멜빵이 붙어있다. 넉넉한 패딩감도 빠질 수 없다. 바지 위에 외출 시 한 겹을 더해주는 용도다. 그걸 입으면 하체만 잔뜩 빵빵한 미셸린 타이어 마스코트 같은 모습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걸을 때 스윽스윽— 다리가 스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따듯함은 스노우 팬츠의 이차적 효용일 뿐이다. 이 복식을 갖춰야 할 나위는 따로 있다. 이걸 입어줘야 소복이 쌓인 눈더미에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다이빙할 수 있다. 팔다리를 마구 움직여 눈 속 헤엄을 칠 수 있고, 눈밭을 가로질러 뛰다가 뒤로 털썩 누워버릴 수 있다.


레인부츠를 장만해본 사람은 안다. 그 한 켤레의 존재에 얼마나 다음 비가 기다려지는지. 호우도 두렵지 않은 마음의 흥을 제공하는지. 남사스러워도 괜히 첨벙첨벙 걷게 하는지. 장화 신은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웅덩이에 끌리듯, 입었다 하면 자석처럼 눈에 철썩 붙어 몸을 마구 비비적거리게 하는 스노우 팬츠였다.


모스크바에선 모두가 학교에 스노우 팬츠를 입고 왔다. 교실 입구엔 학생마다 스노우 팬츠를 걸어둘 작은 고리들이 줄지어 붙어있었다. 쉬는 시간 광란의 눈싸움 후에도 몸을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끝. 과연 바지까지 뽀송뽀송했다. 비벤텀(미셸린 타이어 마스코트 이름) 군단의 등교는 친구들의 시끌벅적 말소리와 씃쓱씃쓱—하는 소리로 복도를 울렸다. 그 소리는 익숙하고도 외출이 기다려지는 소리였다. 당장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소리였다. 전방으로 몸을 힘껏 날리고 싶었다. 아차 하고 발을 잘못 내디뎠다가 양말이 젖어서 하루 기분을 완전히 망쳐본 사람도 레인부츠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설렘을 느낀다. 스노우 팬츠가 있는 모스크바의 겨울에는 그런 류의 설렘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어딜까? 데스 밸리? 땡. 사하라 사막? 또다시, 땡이다 (겨울에 갔더니 추웠다). 시베리아인들이 대답하기를, ‘반야’란다. 러시아 사람들의 사우나, 이름하야 ‘반야’가 제일로 뜨겁다. 사시사철, 밤낮 구분 없이 활활 타오른다. 불가마는 러시아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 더우면 언제라도 뛰쳐나가길. 문밖은 온통 눈이니. 덕분에 그곳의 온도는 끝을 모르고 올라간다. 실제로 반야를 제대로 즐기는 법은, 빈사 상태에 이르기까지 온도를 높이다가 버틸 수 없을 때 눈 속으로, 겨울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랭 기후는 자연 ‘아이스방’ 정도인 거다.


반야에선 지켜야 할 온도는 없고 지켜야 할 착의가 있다. 머리가 너무 뜨거워지면 위험하니 들어갈 땐 골무 같은 모자를 쓴다. 다 벗고, 모자만 쓰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왜냐면 반야는 무척 가까이에 있다. 그곳은 스킨로션과 때밀이 수건을 챙겨 가는 동네 사우나가 아니다. 생활 필수 공간인 만큼 보통 집에, 욕실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 집에도 있었다. 여덟 살 나는 틈만 나면 몸을 지지러 들어갔다. 반야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나는 매일 아침잠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 중 하나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다. 일어나겠다고 또렷하게 대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 알람과의 버티기 싸움에서도 우세한 전적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겨울 아침, 따듯한 이불속을 벗어나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커가면서 태도가 교정되긴 했지만 어릴 땐 왜 깨우느냐고 짜증을 내다가 혼자 분에 받쳐서 울어버리는 아침들도 허다했다. 그때가 딱 모스크바 살 적이었다.


늦지 않게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둘둘 말린 이불속에 숨어 들어서 어떤 호령에도 꼼짝 않고 쿨쿨 잠만 자는 자식을 보다만 아빠가 기지를 발휘했다. 이불과 내용물(?)을 통째로 들어서 반야에 옮긴 것이다. 그렇게 넣어두면 오래 걸리지 않아 내가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표정이 밝았다. 반야가 깨워준 아침은 너무 개운했다. 요즘 마시는 모닝커피 따위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따듯한 공기가 이불부터 덥혔다. 저항하느라 잔뜩 웅크린 몸은 어느새 축 늘어졌다. 밤새 굳었던 근육이 사르르 녹으면 어느새 이불을 걷어차버리고 있었다. 콧구멍으로 젖은 나무 향이 들어올 때 단잠은 물러갔다. 눈가도 촉촉하게 마사지해주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감각의 세계로 서서히 깨어났다. 더 좋은 세계로 끌리듯 이동했다. 그렇게 하루의 따듯한 시작을 즐겼다. 땀이 맺히기 전까지만. 모스크바의 아침은 그런 보드라운 나른함이 있었다.



모스크바는 춥다. 그러나 추위 가운데 무언가 환하게 빛난다. 열정과 온기만은 멈추지 않은 그 겨울왕국은 가슴속 깊이, 보석 같은 일상을 숨겨두었다. 따스하고 유쾌한, 감각을 깨우는 하루하루가 존재하는 곳이다.


“겨울이 내놓는 많은 현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부서지기 쉽고 섬세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바꿔 말해보고 싶다. 겨울이 내놓는 많은 현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듯하다. 포근하다. 빛과 그림자가 한 몸이듯, 러시아의 날씨는 그 어디보다 뜨거운 삶의 모습을 만들었다. 추위는, 원래 그렇게 즐기는 것이다. 겨울은 그렇게 따듯한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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