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묻어두고 사는 이들을 위한
무엇도 없는 곳에서 할 일을 찾고 있다면.
아빠의 차는 동쪽으로 모스크바를 벗어났다. 우린 시베리아 땅을 마구 달렸다. 풍경은 단조로웠다. 비탈 언덕과 골짜기를 넘었다. 강과 호수는 꽁꽁 얼어 눈에 띄지 않았으나 날은 환했고, 드문드문 성긴 수풀이 대지에 대신 무늬를 냈다.
반나절을 달렸더니 통나무로 만든 단층집들이 보였고, 우리는 한 오두막에 짐을 풀었다. 나무 냄새였을 쉰내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아빠가 벽난로에 불을 떼 주니 방안이 금방 훈훈해졌다. 그러자 냄새도 조금 무뎌졌다. 엄마와 아빠는 얇고 길쭉한 판때기를 아래에 댄 신발을 신고 숙소를 나섰다. 양손에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크로스컨트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빠는 작은 언덕을 넘기 위해 허리를 앞으로 힘껏 숙였다. 뒤로 스르륵 밀려났다. 다시 폴을 눈 속에 깊숙이 내리꽂고 뒤뚱뒤뚱. 스르륵. 눈밭에 두 줄 흐린 자국이 남았다. 나는 문지방에서 아빠의 힘겨운 모습을 지켜봤다. 한참 후 두 분은 우거진 자작나무 숲의 초입에 다다랐고, 뒷모습이 조금씩 작아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짧은 산책을 하기로 했다. 엄마와 아빠의 뒤를 따랐다간 두 분을 금세 앞지를 게 분명했다. 오두막을 반 바퀴 돌아 시베리아의 벌판 속으로 걸었다. 삭풍이 목도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시원했다. 겨울의 온도는 살갗에 상쾌한 구석이 있다. 눈밭은 온화한 곡선으로 울퉁불퉁한 바위와 나뭇더미들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균형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을 천천히 내딛어야만 했다.
나는 아마 그때 처음으로 지평선을 본 것 같다. 나는 대륙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는데, 사방으로 밟을 때 뽀득 소리를 내는 눈이 전부였고, 하늘엔 새가 없었다. 나를 반긴 건 건물 하나 없는 너른 벌판이었고 닿을 곳을 잃은 시선은 조금 방황했다. 두텁고 한가로운 공중이 나를 품으로 안았다. 나는 시베리아의 광막한 인사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길. 지구 둘레 4분의 1에 가까운 거리. 시간대가 일곱 번이나 변하고, 눈 덮인 전나무 숲과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와 스텝 지대와 통나무 정착촌이 번갈아 자리 잡은 시베리아 벌판.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풍경을 읽다가, 눈물을 조금 흘렸다. 낯선 땅에서 목도한 광활한 자연에, 그렇게 불현듯, 울었다.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로 향하며 처음으로 요동벌을 마주했다. 그때, 산과 나무 한 그루 없는 공간에서 그는 “소리 내어 울기 좋은 곳이구나!”라고 탄성을 냈다. 평생 한반도에서 살아온 그에게 하늘과 땅이 맞닿은 새로운 광경은 어떤 눈물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현실의 맥락을 벗어난 공간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기쁨의 발현이었다고. 태중의 깜깜하고 좁은 곳에서 빠져나와 손발을 펴고 기지개를 켜는 갓난아기의 힘찬 울음 같은.
나는 그런 대찬, 시원한 울음을 내본 적이 잘 없었다. 누가 볼까 소리 죽여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고, 엄마 아빠가 걱정할까 꾹 참았다. 백인들만 가득한 학교에서 여자 친구들이 화장실에 못 가게 문을 막고 설 때도, 남자 친구들이 팬티를 벗기겠다고 쫓아올 때도, 그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조금은 재밌단 듯이 쳐다볼 때도, 생일을 맞아 엄마가 컵케이크를 구워 학교에 보냈는데 아무도 먹지 않았을 때도, 단 한 번도 동네가 떠나가라 악을 쓰며 울지 못했다. 그럴 심정이었음에도.
좋을 호, 울 곡, 마당 장. 울기 좋은 곳, 호곡장(好哭場). 나는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를 울음터 삼았다. 잠깐인 줄 알았던 눈물은 자꾸 흘렀다. 참고 억제하여 감히 아무 장소에서나 터져 나오지 못하는 눈물이 있다. 인생이 나를 소외시킬 때, 소리 질러 억눌린 마음을 위로할 공간. 가슴이 확 트이는 공간은 어디든 호곡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호곡장을 찾아도 현실을 박차고 끊어낼 순 없다. 응당 흘릴 눈물을 다 흘리고 나면, 버둥거리며 삶의 고비를 넘어온 감동에 달해 또 울음이 난다. 그러니 운다는 건, 슬퍼서만이 아니라, 털어내고 다시 살아가기 위함이기도 한 것 같다. 한이 찬 가슴은 누구에게도 본마음이 아닐 테다. 울음이라는 감정의 발현을 통해 마음의 응어리를 쏟아내고 새로운 기쁨의 가능성을 찾는 공간, ‘울기 좋은 곳’을 발견한 나는, 돌아서는 발걸음에 생각했다.
언제든 시베리아 벌판으로 도망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