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을 읽고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문학동네
1권.
1.
'모든 게 조건적이고, 모든게 상대적이며, 이 모든 게 그저 하나의 형식일 뿐이야.'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의 작은 편린일 뿐이었지만, 그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
하지만 말하자면 파멸에 대한 냉소라 할 수 있을 정말감이 돌연 그를 사로잡았고, 그는 손을 한번 내젓고는 가던 길을 갔다.
P 146
2.
자기를 지켜냈다는 승리감, 덮쳐오던 위험에서 구제되었다는 사실이 어떤 예견도, 분석도, 미래에 대한 수수께끼나 그 해답도, 어떤 의혹이나 의문도 없이 이 순간 온 전재를 가득 채웠다. 충만하고, 본능적이고, 순수하게 동물적인 기쁨의 순간이었다.
P 153
3.
그는 손을 펴고 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팔을 휘둘러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이 순간 스스로를 모든 사람, 모든것으로부터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느껴졌다.
P 179
4.
"그러니까 넌 돈 때문에 자신을 파는 거야, 그러니 어떤 경우든 비열하게 행동하는 거라고, 그나마 기쁘구나 최소한 네가 얼굴은 붉힐 줄 아니 말이다!"
"날 존중하고 소중히 여길 거란 확신이 없다면 난 그 사람하고 결혼하지 않아. 나 스스로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있다고 굳게 믿지 않는 다면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
그런 결혼은 오빠가 말하는 것처럼 비열한 게 아냐! 만일 오빠가 옳고, 만일 내가 정말 비열한 짓을 하기로 결심한 거라 해도, 오빠란 사람이 정말로 내게 이렇게 무자비하게 말해도 되는거야? 어째서 오빠는 오빠에게도 없을 그런 영웅적인 면을 내게 요구해? 이건 독재고, 이건 폭력이야! 만일 내가 누군가를 파멸시킨다면, 그건 단지 나 자신뿌닝야.... 난 아직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
P 360
2권
5.
새롭고 기묘하고 거의 병적이기까지 한 감정으로, 이 창백하고 여위로 균형잡히지 않은 뾰족한 얼굴을, 그토록 열정적이고 준엄하고 힘찬 감정으로 반짝일 수 있는 이 온순하고 푸른 눈을, 분노와 격분으로 여전히 떨고 있는 이 작은 몸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자니, 모든 것이 점점 더 이상하고 불가사의하게만 느껴졌다. *'유로지비'다!
* '바보'나 '미친 사람'을 뜻하는 '유로트'에서 유래한 말로, '바보 현자' 또는 '미친 현자'라는 뜻이다. 러시아 정교 전통에서는 주로 세속적인 가치를 버리고 선행을 숨기고서 고행과 모욕을 감수하며 떠도는 수행자를 일컫는다.
P 79
6.
그녀가 자신을 전부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지금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
어쩌면 이미 오래된 그녀의 진짜 비밀은 사실 바로 이런 감정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그는 이해했다.
P 82 ~ 83
(소냐가 낭독하는 구절은 요한의 복음서 11장 1절에서 45절까지다.)
7.
자존심과 허영심이 이렇게 발작적으로 터지는 일은 더없이 가난하고 주눅든 사람들에게 종종 있는 일로, 때로 그들은 분풀이하듯 절제하지 못하고 돈을 써버린다. 한술 더 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주눅든 사람에 속하지도 않았다. 상황이 그녀를 아예 죽일 수는 있어도, 정신적으로 그녀를 주눅들게 하는 것, 즉 겁을 주어 그녀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P 165
8.
나폴레옹이라면 갔을까, 안 갔을까 하며 내가 며칠 동안이나 괴로워했다면, 바로 그런 방식으로 난 이미 내가 나폴레옹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은 셈이지... 이 모든 쓸데없는 생각으로 인한 온갖, 온갖 고통을 견뎌내면서, 소냐, 난 내 어깨에서 그 모든 걸 가볍게 털어버리고 싶었어. 소냐, 난 궤변 없이 죽이고 싶었고,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이려 했어! 이 점에서는 나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죽인 게 아냐, 말도 안되는 얘기지! 돈과 권력을 얻어 인류에게 선행을 베풀고 싶어서 죽인 것도 아니야. 말도 안되는 얘기야! 난 그냥 죽였어. 자신을 위해서, 나 하나마을 위해서 죽인 거야. 거기 가서 내가 누군가의 은인이 되든, 아니면 평생 거미처럼 거미줄을 치고 모두를 잡아 산 채로 즙을 빨아먹든, 분명 그 순간엔 둘 다 마찬가지였어!... 그리고 중요한 건, 소냐, 돈이 필요해서 살인을 저지른 건 아니라는 거야. 돈이 아니라 다른 게 필요했어... 이제 모두 다 알겠어... 날 이해해줘. 아마 같은 길을 간다 해도 다시는 절대로 살인 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야. 난 다른 걸 알아내야만 했어, 다른 것이 내 팔을 잡아끌었지. 그때 난 알아내야만 했던 거야,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인지 아니면 인간인지,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야 했어. 내가 넘어설 수 있는가, 없는가! 내가 감히 몸을 숙여 권력을 주워올릴 수 있을까 없을까? 나는 떨고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가, 아니면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P 230
9.
"각자 자기 식대로 사는 거고, 자신을 가장 잘 속일 줄 아는 사람이 누구보다 즐겁게 사는 법이오. 하하! 대체 왜 그렇게 도덕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거요? 용서하시오, 친구, 내가 죄 많은 사람이 돼놔서요. 하하하!"
P 328
10.
'자, 어째서 내 행동이 저들에게 그렇게 추악하게 여겨지는가?' 그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악행이라서? '악행'이란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양심은 평온하다. 물론 형사상의 범죄를 저질렀다. 물론 법조항을 위반했고 피를 흘렸다. 자, 그러니 법조항 대신 내 목을 가져가란 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권력을 물려받지 않고 스스로 쟁취한 많은 인류의 은인들초자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처형당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의 걸음을 견뎌냈고, 그래서 그들은 옳다, 하지만 난 견뎌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 걸음을 자신에게 허용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인정한 유일한 자신의 죄였다. 첫걸음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수했다는 것, 그뿐이었다.
P 425
11.
그들은 기다리며 참기로 했다. 그들에겐 아직 칠 년이 남았다. 그때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무한한 행복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부활했고, 그 사실을 알았고, 새로워진 자신의 온 존재로 그걸 온전히 느꼈으며, 그녀는, 그녀야말로 오로지 그의 삶 하나만으로 살지 않았던가!
P 433
12.
선하며 아름답고, 아름답고 선할 수 있지만, 선하다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아름답다고 선한 것도 아니다. 선에 절대적으로 대립할 수도 있는 아름다움,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그힘, 때로는 이것이야말로 삶의 진실인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 수도를 배경으로 아주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소설.
재미있는 범죄소설로 읽히기도 하고 치밀한 심리서이기도 하며 숭고한 종교와 법과 사회 그리고 선과 악, 정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고전이다.
역사의 흐름속에서 이 소설이 등장한 시기를 파악해보니 더욱 재밌었다.
당시 왕정이었던 러시아, 알렉산드로 2세가 농노해방을 선포했다. 그러나 반쪽짜리 해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를 위해선 주인에게 돈을 지불해야했다. 몸은 자유가 되었지만 많은 소시민들은 여전히 큰 빚을 지고 있었고 일자리도 부족하고 노동의 대가는 항상 턱없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 도시로 향했고 소설 속의 찌들고 더럽고 범죄가 들끓는 수도가 배경이 된 것이다.
또한 대학생들은 사회주의라는 개념에 아주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공산당 선언은 1840년대 발표되어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상적이고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한 이데올로기로, 여러 이념들이 사이에서 아주 흥미롭게 회자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낡은 제도는 사라지고,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고 시민의식이 싹트는 시기였을 것이다.
몰락한 귀족, 부정한 방법으로 배를 채운 소수의 사람들, 가난하지만 머리가 커지는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혼란스럽게 또는 스스로 잘 융화하며 그 시대만의 분위기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16대 대통령으로 링컨이 당선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남북전쟁을 감행했다. 유럽에서도 비슷하게 노예해방운동이 일어나고 개혁과 개방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반면 그 당시 우리나라를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시대이다.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청나라에 기대며 치열한 이권다툼을 하며 결과적으로 근시안적인 정책을 펼쳤던것이다. 일본은 당시 전면 개방을 하며 서구의 문물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힘을 키웠던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도하고 미묘한 기분이 든다. 역사를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은 참 의미없는 생각이지만, 가지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진하게 남는 역사는 맞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