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여운이 남는 순간이 있다.
인생 영화를 보고 났을 때나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봤을 때, 마음을 울리는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가 그런 순간이다.
여운의 사전적 의미는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있는 운치를 뜻한다. 감동이 마음속에서 떠나려 하지 않고 계속 맴도는 현상이다. 감동을 느낀 상황과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마치 버퍼링이 걸린 영상처럼 그 구간을 반복해서 머릿속에서 상영하는 것이다.
마음에 감동이 머무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여럿 있었지만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은 순간은 환호성을 지르며 감탄했던 순간보다도 은은하게 남아 내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던 그런 순간인 것 같다. 비유하자면 거칠게 몰려드는 파도보다 고요한 호숫가에 잔잔히 퍼지는 물결 같은 그런 순간.
14년 정도 지난, 25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취업을 준비하던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던 탓인지 머리를 식히고 싶어 양산의 내원사계곡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의 내원사 계곡은 인근 대학생들이 MT 장소로 많이 찾던 곳 중의 하나여서 그런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계곡에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찾았지만, 막상 사람이 북적이는 모습을 보니 좀 더 조용한 곳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무작정 계곡 초입에 있는 일주문을 지나 등산을 하듯 1시간 정도 넘게 걸어 올라갔다. 주변의 풍경과 계곡이 아름다웠지만 이왕 올라간 김에 내원사를 직접 구경하고 싶어 계속 걸어 올라갔다. 계속 걸어 올라가다 보니 차량을 통제하는 지점이 나왔다. 그곳을 지나서도 한참 더 올라가니까 포근해 보이는 숲에 가려진 소담해 보이는 사찰이 보였다. 내원사였다. 비구니 스님들이 머무는 사찰인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화단의 꽃들이며 절 안팎으로 꾸민 풍경이 정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었다.
절 안을 구경하는데 방 하나를 비워두고 절을 찾은 손님들이 따뜻한 차를 마시고 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둔 곳이 있었다. 차를 어떻게 우려내면 되는지도 친절히 적어서 벽에 붙여 놓았다. 나는 벽에 붙은 글을 보며 차근차근 차를 우려내고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보았다. 민들레차였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민들레 특유의 청초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평일에 찾은 터라 때마침 절을 찾은 관람객도 없어서 마치 다실을 통째로 빌린 기분이었다.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자연을 바라보고, 차를 한 모금 머금고 방안을 훑어보며 나는 절의 풍경과 합치되고 있었다.
차를 또 한 모금 머금으며 잠시 눈을 감았는데 풍경소리가 잔잔한 바람과 새들이 지저귀는 운율을 타고 내가 있는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풍경의 맑은 음색이 바람을 타고 내 귓전에 닿자 따뜻한 손길이 마음을 쓰다듬는 기분이 느껴지며 무언가 울컥하는 마음이 단전에서 올라왔다.
취업 준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늘 정신없이 헤매며 주변의 상황과 비교하며 나를 매몰차게 몰아가기만 할 뿐 나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보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풍경소리는 더 은은하게 나를 감쌌다.
풍경소리는 한참이나 바람을 타고 내게로 밀려 들어왔다. 엄마 손을 잡고 찾아온 꼬마 숙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온종일 그곳에 있었을 것 같다.
엄마 손을 찾은 아이들이 고요하고 오붓한 시간을 인생의 기억으로 남길 수 있도록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실을 빠져나왔다. 다실을 빠져나오는 길에 풀을 뽑던 스님과 눈길이 마주쳤다. 스님은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그 미소에는 다실에서 준비한 차를 잘 마셨는지, 그 시간이 어땠는지, 자신을 보살피는 시간을 잘 가졌는지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으리라. 나는 멋쩍지만, 감사의 의미를 담아 스님께 인사를 남기고 절을 빠져나왔다.
내려가는 길에 표지에 새겨진 문구가 또 한 번 나를 붙들었다.
태어남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짐이다.
후에 알기로는 서산대사의 시로 알고 있는데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인 태어남과 죽음조차 한 조각구름처럼 가볍게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껏 나를 붙들고 있던 취업에 대한 압박이나 여러 걱정은 거기에 끼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길에 바람이 가볍게 일렁이며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살랑살랑 흔들어 대었다. 흔들거리는 풀들을 따라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계속 내 마음에 울려 퍼졌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은은한 여운으로 남아 때론 삶이 무기력하거나 힘겹게 느껴질 때 큰 위로가 되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순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