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낙원(AKMU)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by 기억의 틈


AKMU(소문의 낙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이 문장은 이제 거의 격언처럼 굳어 있다. 마치 떠나는 선택 자체가 이미 잘못된 방향이라는 듯 우리를 붙잡아두는 말이다. 하지만 AKMU의 "소문의 낙원"을 듣고 있으면 이 단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노래 속 세계는 낯설 만큼 따뜻하다. 지친 나그네에게 건네는 말, "따뜻한 수프와 고기가 있어요." 이 문장은 단순한 환대가 아니다. 어디엔가 분명히 '쉴 수 있는 자리'가 존재한다는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선언이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고 익숙한 일상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것들. 어쩌면 그것들은 떠나야만 마주칠 수 있는 종류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나는 특히 "당신의 불치병은 그곳에 존재할 수 없어요"라는 구절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 문장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 일종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상처, 혹은 반복되는 삶의 패턴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환경이 바뀌면, 관계가 달라지면,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면 그 '불치병'이라 믿었던 것조차 더 이상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암시다. 이건 해결이 아니라 해방에 가까운 위로다.


흥미로운 건 같은 이찬혁이 만든 비비드라라러브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는 점이다. 그 노래는 오히려 환상을 경계한다. 감각적으로 화려하고 과장된 표현 속에서 사랑과 세계는 점점 더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그 끝에는 묘하게 공허한 감각이 남는다. 마치 '우리가 믿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쉽게 과장되고 왜곡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소문의 낙원"이 조용히 손을 내미는 노래라면 "비비드라라러브"는 눈부신 빛으로 시선을 끌어당기는 노래다. 하나는 낮은 온도로 사람을 안심시키고 다른 하나는 높은 채도로 감각을 자극한다. 그래서 둘은 모순이라기보다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지는 두 개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정말 우리가 찾는 것은 '어딘가에 있는 낙원'일까,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이 대비는 음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문의 낙원"은 전반적으로 여백이 많은 편곡을 갖고 있다. 잔잔한 기타와 담백한 리듬, 그리고 공간을 충분히 남겨두는 보컬. 악기들은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풍경을 만든다. 마치 실제로 존재할 법한 작은 마을 혹은 따뜻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을 준다. 소리는 많지 않지만 그 빈 공간이 오히려 쉼을 만들어낸다.


반면 "비비드라라러브"는 훨씬 밀도 높고 다채롭다. 신스 사운드와 리듬의 변화, 갑작스럽게 튀어 오르는 멜로디는 현실보다는 '과장된 감각'에 가깝다. 색감으로 치면 원색에 가까운 음악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계속해서 시선을 요구한다. 듣는 사람을 쉬게 하기보다는 몰입하게 만든다.


그래서 두 곡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질문이 더 또렷해진다. 우리는 어디에서 쉬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을 '낙원'이라고 부를 것인가.


완벽한 유토피아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찬혁이 다른 노래에서 말하듯 우리가 기대하는 이상향은 결국 현실 앞에서 균열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떠나는 선택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소문의 낙원"이 말하듯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것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낙원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에 가깝다. 모든 문제가 사라진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은 의외로 우리가 '도망쳤다'라고 생각한 바로 그 자리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조금 바꿔보고 싶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망친 이후에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낙원이 있다.


그리고 그 낙원은 어쩌면 거창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수프 한 그릇과 잠시 아프지 않아도 되는 마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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